자금시장 얼어붙고, 엔고 역풍에 실질 효과는 미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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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8호 18면

지난달 28일. ‘구로다 서프라이즈’가 또 다시 시장을 흔들었다. 이날 열린 일본은행(BOJ) 통화정책회의에서 예상과 달리 기준금리(-0.1%)를 동결하고 기존의 양적완화(QE)를 그대로 유지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구로다 하루히코(黑田東彦) 일본은행 총재는 “마이너스 금리의 정책효과가 실물경제에 파급되는데 시간이 필요하다”며 추가 부양을 서둘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석달전 마이너스 금리라는 공격적 통화정책을 들고 나왔던 일본은행이 수세적으로 돌아서자 시장은 다시 흔들렸다. 닛케이지수는 통화정책회의 이후 열린 2거래일 동안 6.61% 하락했다. 엔화가치는 고공행진 중이다. 지난달 28일부터 5일까지 엔화가치는 달러 대비 4.56% 상승했다. 골드만삭스의 마이클 카힐은 “일본은행이 정책을 내놓지 않은 것(No Action)은 치명적인 오판”이라고 지적했다.


220조엔 풀고도 불황 맞자 ‘-0.1% 금리’?내 놔미국 인터넷매체 뉴스맥스는 “일본은행이 추가 부양을 미루면서 엔화 가치가 급등해 수출기업의 경쟁력은 떨어지고 주가도 곤두박질하는 등 일본 경제 회복 전망이 더 어두워지고 있다”며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성과를 낼 수 없게 된 일본은행의 처지가 측은할 지경”이라고 보도했다.


구로다가 선택할 수 있는 패는 많지 않다. 정책 금리를 더 내리거나 양적완화 규모를 늘리는 것 정도다. 문제는 정책 실패에 따른 시장의 의구심이 커지는 데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일본은행이 무언가를 시도할 수록 손해만 보는 악순환에 빠졌다”고 지적했다.


일본은행은 양적완화라는 통화정책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선구자다. 2001년 3월 일본은행은 중앙은행으로는 처음으로 양적완화를 실시했다. 제로금리 정책만으로 시중에 돈이 돌지 않자 장기국채 4000억엔어치를 매입한 것이 시작이다.


국채나 다양한 자산을 매입해 시중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양적완화 개념은 리하르트 베르너 영국 사우샘프턴대 교수가 처음 제안했다. 1994년 일본 자딘플레밍(현 JP모건자산운용) 수석 이코노미스트로 일하며 당시 일본의 디플레이션을 목격한 베르너가 ‘양적금융완화(量的金融緩和, 료테키 긴유칸와)’란 개념을 제시한 지 7년 만에 일본은행이 실험에 나선 것이다. 일본은행의 양적완화는 5년만에 중단됐다. 성급한 출구전략 탓에 일본 경제는 다시 침체로 빠져들었다.


비실대던 일본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총력전에 나선 인물이 2012년 12월 취임한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다. 통화완화·재정정책·구조조정이란 ‘3개의 화살’을 앞세운 아베노믹스의 시동을 걸었다. ‘양적완화→엔화 약세→수출 확대→임금인상→소비개선→세수확보를 통한 재정적자 감소’란 시나리오를 기대한 아베노믹스에 힘입어 일본 경제는 잠깐 활력을 찾는 듯했다. 엔화 약세 덕에 일본 기업은 사상 최대의 이익을 올렸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늘어난 기업 이익은 임금 인상이나 투자 확대로 이어지지 못했다. 소비 심리도 얼어붙었다.


올들어 새로운 복병까지 나타났다. 엔고(円高)다. 세계 경기 둔화와 유가 하락, 중국 성장세 둔화가 맞물리며 엔화를 안전한 투자처로 여긴 자금이 몰려 엔화값은 오르기 시작했다. 일본 기업의 수출 경쟁력은 떨어졌고 물가상승률 목표치(2%) 달성도 어려워졌다.


3년간 양적완화로 220조엔을 푼 구로다가 또 하나의 비전통적 통화완화 카드를 꺼내들었다. 1월 29일 일본은행 사상 처음으로 마이너스 금리를 도입한 것이다. 시중은행이 맡긴 지급준비금에 -0.1%의 금리를 적용했다. ‘구로다 서프라이즈’였다. 유럽중앙은행(ECB) 및 스위스·스웨덴·덴마크 중앙은행과 함께 마이너스의 영역에 발을 디딘 것이다.


엔고로 기업 이익 17조원 줄어들 위기대출 비용을 낮춰 시중에 돈이 풀리도록 유도해 경기 부양 효과를 내겠다는 의도였다. 엔화 가치 하락을 통한 수출 기업 실적 개선 효과도 기대했다. 수입품의 엔화 환산 가격 상승에 따른 디플레이션 탈출도 염두에 뒀다. 구로다는 “마이너스 정책금리 도입으로 금융 중개기능이 약화하지는 않을 것이며 주가 상승과 엔화 약세 등 긍정적 효과를 확신한다”고 자신했다.


그리고 100일이 흘렀다. 마이너스 금리까지 꺼내든 구로다의 성적표는 초라하다. 일본 경제는 나아지기는 커녕 오히려 나빠지고 있다. 시장 상황이 예상과 달리 흘러가며 여기저기서 역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일본 경제는 엔화의 덫에 갇힌 형국이다. 지난달 27일(현지시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금리 인상 속도를 늦출 수 있다는 신호를 보내자 엔화 값은 더 올랐다. 미국 재무부가 일본을 한국·독일·중국·대만과 함께 환율 관찰대상국으로 분류하며 상황은 꼬여갔다. 올들어 5일까지 엔화값은 미국 달러 대비 12.78% 상승했다.


엔화 강세로 일본 기업의 실적 악화는 피할 수 없게 됐다.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 신문이 도요타 자동차 등 일본 주요 수출기업 25곳의 환율 변동에 따른 영업이익을 분석한 결과 엔화 값이 달러당 106엔대에 머물면 기업 이익은 1조6300억엔(17조5498억원)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달러당 110엔 수준으로 엔화 값이 떨어지더라도 이익은 1조1400억엔 줄어든다. 기업의 실적이 나빠지며 증시도 힘을 잃고 있다. 닛케이 지수는 올들어 2일까지 15.16% 하락했다.


실물 경제에 미치는 효과도 아직까지는 제한적이다. 한국은행 통화정책국 김보성·박기덕 과장은 ‘주요국 중앙은행의 마이너스 정책금리 운영 현황’ 보고서에서 “시장점유율을 중시하는 은행의 영업 행태로 인해 마이너스 정책금리가 은행의 예대금리 하향 조정으로 충분히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수익 악화에 시달리는 은행이 대출금리를 올리는 방향으로 움직일 경우 완화적 통화정책의 효과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우려도 덧붙였다. 국제결제은행(BIS)도 “마이너스 금리 효과가 단기금융시장으로 전파되지만 예금 금리나 주택담보대출금리 등으로의 파급은 제한적”이라고 평가하며 “금융 시스템 전반적인 불확실성과 리스크만 확대됐다”고 지적했다.


국내투자 대신 해외채권 매수만 15배로금융 시스템 전반의 위기는 이미 나타나고 있다. 경제의 혈관 역할을 맡고 있는 금융회사는 마이너스 금리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 예대마진이 주요 수익원인 시중은행의 경우 안정적 수익 확보가 어려워졌다. 보험사는 돈 굴릴 곳이 줄어들면서 위험이 큰 해외 채권 투자로 눈돌리고 있다. 일본 재무성 통계에 따르면 일본인의 올 3월 중장기 해외채권 순매수 금액은 5조2000억엔으로 마이너스 금리 도입 한달만에 15배나 늘어났다.


마이너스 금리 도입으로 중앙은행과 시중은행의 파트너십에도 균열이 발생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중앙은행이 통화정책을 구사하면 시중은행을 통해 그 영향이 실물 경제로 전달돼 왔다. 이른바 시중은행의 금융 중개 기능이다. 하지만 마이너스 금리 도입 이후 이런 기능이 마비되고 있다. 은행간 자금 시장은 꽁꽁 얼어붙었다.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3월31일 일본 내 은행 콜 시장(단기자금) 시장 잔고는 2조9724억엔까지 떨어지며 1988년 수준으로 뒷걸음질쳤다. 은행간 대출 시장 규모가 마이너스 금리 도입 이전의 8분의 1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가토 이즈루 토탄연구소 대표는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제대로 작동하는 콜 시장은 금융 수요를 예측하고 대출 비용을 산정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요소”라며 “은행간 시장이 마비되면서 통화정책에 따른 시장의 변동성을 줄여주는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 결과 중앙은행이 시중은행을 건너 뛰어(bypass) 소비자에게 직접 현찰을 쥐어 주는 ‘헬리콥터 머니’와 같은 극단적 정책까지 입에 오르내린다. 카일 배스 헤이먼캐피탈 창립자 겸 회장은 CNBC와의 인터뷰에서 “일본은행이 더욱 비전통적 통화정책 수단을 도입해야 할 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그렇다고 섣불리 헬리콥터에서 돈을 뿌릴 수도 없다. 그나마 가지고 있는 정책 실탄을 소진할 수 있어서다. 구로다 총재는 “일본 현행법상 헬리콥터 머니는 위법”이라고 선을 그었다. 니혼게이자이는 “마이너스 금리에만 의지하지 말고 정부와 일본은행이 함께 규제완화와 구조 개혁을 포함한 종합적인 경제 정책을 운영하지 않으면 실물경제나 물가로의 파급 효과는 기대하기 어렵다”고 진단했다.


하현옥 기자 hyuno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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