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논술교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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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심청의 눈 먼 아버지에 대한 지극한 효성은 옛부터 모든 이들에게 귀감이 되어 왔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현실에서 심청의 효는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져야할 것인가?
자신의 목숨까지 서슴없이 바친 그 효성은 갸륵하지만, 심청은 과연 자식을 죽여 눈을 뜬 아버지의 슬픈심정을 조금이라도 생각했던가?
그것을 조금이라도 생각했다면 아버지를 홀로두고 떠날 수 있었을까?
한번 생각해보자. 옛날, 하루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어머니로 하여금 자신의 발을 씻게 하는 한 아들이 있었는데, 그는 효자로 소문이 나 있었기에 그 행동을 이상히 여긴 이가 까닭을물었다. 그러자 그 아들은 『어머님이 원하시고 좋아하시는 일이기에 그저 따를 뿐입니다』라고 대답했다한다.
그는 오로지 어머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남의 이목도 두려워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따랐던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효도란 물질적인 것보다는 부모님의 마음을 즐겁고 편안히 해드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알수 있다.
그렇다면 심청의 행동을 옳다고만은 불수 없는 것이다. 그보다는 자신이 앞 못보는 아버지의 눈이 되어 평생을 편안히 모시는 것이 더 올바른일 일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에는 물질만능주의가 서서히 침투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것에 휩쓸려 물질적인 풍요만이 효도의 최상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대신 부모님의 마음을 잘 헤아려 그 뜻에 따르는 태도를 지녀야겠다.
그것이 진정한 효도인 것이다.

<염명훈><서울 중동고교 2년>
우리겨레의 근본사상은 효가 거의 줄기를 이루어 왔다고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것은 불교에서 유교로 이어지는 그 큰흐름의 물결에서도 효가 가장 인간된 도리라고 믿어졌고, 또 수많은 사람에 의해 실천된 것을 보면 알수 있다.
그래서 효는 어떤 종교적 사상적배경의㈎ 힘이라기 보다는 우리선인의 (나)본능인 것같다.
그러나 바로 그 맹목적 본능, 즉 정도가 지나친 효가 나타나 오히려 역효과를 낸 적이있으니, 바로 심청전의 대목이다.
외동딸의 눈물겨운 고생을㈐느끼는 무능력한 아비의 심정과, 늙고 또한 앞조차 보지 못하는 아비에 대한 자식의 연민중 과연 어느것이 절실하고 더 뜨거울까.
심청이가 왕비가되어 후에 행복해진다는 결과론에 앞서 현대의 우리는 아버지편에 서서 그때 상황에있을 필요가 있다.
과연 이세상 어느 부모가 자식보다 빛이 좋다고 할것이며, 자식없는 광명은 또한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를 모르랴.
아비 심학규는 ㈑아마 심정의 존귀후에 누린 그 엄정난 부귀로도 이때의 마음고생을 ㈒채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물질적인 혜택보다는 ㈓그것의 주체인 마음을 편안히 해드리는게 효의 가장 기본이라는 사실을 심청은 잊고 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기본뼈대의 근본적 효가 세워저 있지 못한 이 심청전은 그 원래의 향기롭고 순수한 심청의 ㈕호세계를 잘못 전하기에 충분하다.
요즘처럼 물질이 많은 세대에 이처럼 부모와는 상관없이 선의의 목적 의식에만 급급해 그㈖수단을 가리지 않는 근시안적 효가 우리 주위에 얼마나 있는지 우리는 안경을 벗어 다시 닦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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