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47)제81화30년대의문화계(180) 연재를끝내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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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이상으로 1백80회에 걸쳐 『30년대 문화계』 라 제목하여 하찮은 이야기를 끄적거려왔다. 작년 여름부터 시작해 해를 넘어 이제 봄이 되었다. 새봄이 되었으니 새 사람이 새 글을 시작하는 것이 좋다.
그동안 끊임없는 격려와 질의를 해주신 독자여러분께 감사를 드리고 여러가지 어렵고 까다로운 질문에 대해 시원한 해답을 못해드린 것을 죄송하게 생각한다.
말할것도 없이 1930년대는 3·1운동을 치르고난 뒤에 우리민족이 크게 깨우쳐 정치적으로 독립운동을 줄기차게 전개시켜가고 문화적으로는 각 방면에 걸쳐 활발한 근대화운동을 벌여온 대단히 중요한 시기다. 그러나 이렇게 중요한 시기임에 불구하고 유감스럽게도 이 시기에 대해 문서로 적어놓은 기록이 별로 없다. 유래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무슨 일이고 거기에 대한 분명한 기록을 만들어 남겨놓지 않고 어렴풋이 기억을 더듬어 이야기하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1930년초부터 해방될때까지 신문사의 학예부· 문화부 일을 십여년에 걸쳐 해왔으므로 언론계는 물론이고 학계·문단·미술계·영화계·음악계등 문화계의 각 방면에 걸쳐 많은 사람과 접촉해왔고 많은 사건을 목격해 왔으므로 문화계 이야기는 대개 짐작하고 있다고 생각해왔었다. 그래서 신문사의 요청에 응한것인데 막상 붓을 들고보니 예상과는 달랐다.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진행시키려면 우선 인물들의 생년월일과 사망 연월일을 알아야하고 여러가지 사건이 일어난 연월일과 장소를 명확하게 알아야 한다. 이런것은 기억만으로는 정확하지 못하므로 참고문헌을 뒤져야 하는데 참고문헌이란 것이 수효도 몇 개 안되지만 제각기 연월일과 구체적 사실이 모두 달랐다. 예를들면 이월화란 여자는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배우이고 연극배우로서 중요한 인물인데 이월화에 대한 이야기가 모두 달랐다. 이것을 정확하게 알기위해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알만한 사람은 다 타계하여 없었다.
문학잡지로 『조선문단』 과 한무렵에 나온 『생장』 이라는 아담한 잡지가 있었다. 김낭운이라는,석송 김형원의 매부로 아주 깔끔한 시인이던 사람이 경영하던 잡지로 이광수 주재의 『조선문단』에 눌려서 빛을 못보았지만 그러나 꽤 오래 계속되었고 좋은 작품을 많이 실었다. 우선 이 잡지 원본부터도 구하지 못했고, 그 잡지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염상섭은 생전에 이 잡지 이야기를 많이 했고, 양심적인 좋은 잡지였다고 말하는 것을 나는 몇번이고 들은 기억이 있다.
이렇게해서 나는 이 글을 써오는데 많은 절벽에 부닥쳤고, 내깐에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모두 정확하다고 장담할수는 물론 없다.
나는 이 글을 쓰는동안 독자로부터 많은 질문의 전화를 받아 이 하찮은 글의 반향에 대해 놀랐다. 그 대부분의 질문이 내 기억으로는 이러이러한데 네가 쓰는 것이 틀리지 않았느냐는것, 또는 안서 금억은 우리나라에서 에스페란토를 제일먼저 시작한 사람인데 그 공로에대해서는 한줄도 안쓰고 쓸데없는 딴소리만 쓰고 있으니 웬일이냐고 꾸중하는 말, 우리 아버지는 어느 신문사에서 글잘쓰기로 유명했다는데 왜 그 이야기는 안쓰느냐는 항의, 어느 유명한 애국지사의 후손이 누구이며 지금 살아있느냐는, 흥신소에나 알아보아야할 문의 등등 실로 가지각색의 질문이 많았는데 이 질문에 대해 속시원한 대답을 못한것이 마음에 걸린다.
이『30년대의 문화계』는 30년대 문화계의 한귀퉁이만을 이야기한것에 지나지않으므로 앞으로 더좋은, 더 많은 여기에 대한 기록이 나오기를 바라며 그동안 독자들의 애독에 거듭 감사한다. <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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