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열기에 걸 맞는 무대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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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각본과 배우가 아무리 좋아도 걸 맞는 무대가 없이는 감동의 연극을 기대할 수 없다. 『춘향전』 은 역시 남원 광한루를 무대로, 『햄릿』 은 역시 해무 덮인 서구의 고성을 무대로 해야한다.
전국에 열풍을 일으키고 잠자던 정치에의 욕구를 촉발시킨 채 시작하자마자 막을 내린 총선합동유세장에서 절감한 것은 역시 「무대의 부적합」이였다.
누구나 아는바와 같이 민주정치의 핵심은 「대화와 협상의 정신」 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국민적 염원인 「정치선진화」 의 기반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진흙탕의 학교운동장에 수만의 군중을 모아놓고 한 표를 호소하는 이번 총선의 무대는 그 같은 「대화와 협상」 의 이념을 구현하기에는 전혀 걸맞지 않는 무대로만 보였다.
대부분의 후보자는 차분한 논리로 유권자를 설득하고 계도하려는 자세가 아니라 어떻게든 극적인 발언과 제스처로 청중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기에만 급급한 모습이었다.
설득이 아니라 선동, 정책이 아니라 원색의 비방이 더 효과적이라고 믿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같은 청중의 기대수준을 밑도는 후보들의 연설 행태는 후보자신의 미숙과 함께 「진흙탕 운동장」 이라는 무대의 탓이 크다고 생각됐다.
선거는 국민의 정치에의 욕구와 참여를 효과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을 확보해야만 본래의 기능을 다할 수 있다.
진흙탕의 합동유세는 우리사회의 발전, 성숙과는 아무래도 걸맞지 않아 보이는「무대」였다.
대통령후보가 나란히 TV에 나와 전국민들이 보는 앞에서 당당하게, 그러나 정연한 논리로 불꽃튀는 토론을 벌여 국민의 선택을 돕는 미국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현대국가는 문명의 진보와 비례해서 더 많은 새롭고 세련되고 효과적인 선거운동의 방식들을 개발, 활용하고 있다.
소란스럽고 실속 없는 옥외군중집회 보다는 소규모의 실내집회 등 다양한 방법의 선거운동이 얼마나 많은가.
신문·방송·TV의 이용을 금지하는 것은 물론 유세장에서의 피킷사용, 유인물 배포까지 규제, 국민의 후보선별기회를 제한하고 대부분 후보자들을 범법자로 만들고있는 현행 선거관리 제도의 합리적 보완이 무엇보다 시급하다는 느낌이었다.
이제 운동장의 「절규정치」를 실내의 「대화정치」로 끌어들여야 한다. 그것이 정치선진화의 첫걸음이 될 것이다.
선거가 말 그대로 「국민의 축제」가 될 수 있도록 선거운동방식과 무대확대, 현대화를 촉구한다.
그 숱한 스포츠중계·오락프로·광고홍수로 시청료와 전파를 낭비한다고 비난이 높은 TV를 선거에 돌러 관심 있는 유세의 중계나 각 당의 정책토론 등을 유도한다면 아마도 유세장의 군중, 정국의 분위기는 눈에 띄게 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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