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국정감사 ‘총수 망신 주기 호출’에 마비되는 기업 활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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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달 10일 국정감사를 앞두고 국회의 ‘기업인 소환’이 다시 시작됐다. 산업통상자원위원회는 지난달 무려 150여 명에 달하는 기업인을 증인으로 검토했다고 한다. 야당이 불러내자고 한 기업인만 146명에 달한다. 무슨 문제가 있으니 누구를 불러 들어보자가 아니라 무더기로 다 소환해 군기를 잡자는 식이다. 다른 상임위까지 합하면 수백 명은 될 것이다.

 국감 때 기업인들을 불러 망신 주기는 연례 행사가 된 지 오래다. 국정감사는 말 그대로 정부의 행정과 예산 집행 등에 대해 따져보는 것이다. 민간 기업은 주요 대상이 아니다. 그런데도 증인·참고인 제도를 악용해 기업인들을 대거 불러다 망신 주는 게 고질병처럼 돼 버렸다. 재계 순위가 높은 재벌 총수를 불러내 오래 호통칠수록 국회의 권위가 살아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기업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상임위별로 ‘총수 호출’ 경쟁도 치열하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산업통상위와 정무위원회·기획재정위원회 등 3곳 상임위에서 ‘겹치기 증인 출석’ 요구를 받고 있다. 심지어 기업업무와 아무 연관이 없는 상임위까지 대기업 총수를 타깃 삼고 있다. 농림해양수산식품위원회의 유성엽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을 증인으로 신청했다. 우루과이라운드 이후 자유무역협정(FTA) 체결로 농민은 손해를 본 반면 수혜를 보는 대표적 업종이 자동차산업이니 대표 기업 총수인 정 회장을 불러 따지겠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국회의 수준을 의심케 하는 어이없는 발상이다.

 재계는 재계대로 총수가 국감에 불려가지 않도록 총력전을 펼치느라 정신이 없다. 임원들이 모두 동원돼 총수를 호출한 해당 상임위 국회의원을 찾아 통사정하느라 투자와 경영을 미룰 정도다. 국감 전후 두 달여간 국감에 올인하느라 기업 활동이 전면 마비되는 일이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세계 경제는 한 치 앞이 안 보이는 불확실성에 빠져 있다. 어느 때보다 기업가 정신이 필요한 때다. 그런데도 국회는 걸핏하면 기업인을 불러 망신 줄 궁리만 하고 있으니 기업가 정신인들 어디 살아남을 수 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