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의 한국인<10>이철수씨 살인 누명 벗긴 재미 김경원 기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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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미국 새크라멘토 유니언 지의 이경호 기자 (56) 는 캘리포니아 정치인들은 ,물론 「레이건」 미 대통령까지 그를 알아주는 실력 있는 노장이다.
지난 30년 동안 폭로 전문기자로 활약해온 이씨는 미 언론계에서 일하는 몇 안 되는 한국인 기자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존재이기도하다.
그를 만난 첫 인상은 이 같은 명성과는 달리 퍽 소탈하면서도 정열적인 것이었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과 테가 굵은 안경이 그의 나이를 .대변하고 있었지만 침을 튀기고 책상까지 두들기면서 말을 잇는 모습은 그가 아직도 현장을 뛰는 현역임을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미국인 동조자 많아>
이기자의 취재대상이 된 사람은 세 번 놀란다고 한다. 먼저 명성에 비해 별로 준수하지 못한 얼굴과 허름한 옷차림에 놀라고 인터뷰 도중 질문의 날카로움에 다시 놀란 뒤 다음날 신문에 실린 기사에서 그의 탁월한 문장력에 또 한번 놀란다는 것이다.
그의 기사는 매섭기로 정평이 나 있다. 기자생활을 모두 부정과 부조리를, 파헤치는데 바친 그는 기자 특유의 감각으로 한번 대상을 찾으면 끈기 있게 달라붙어 끝까지 이를 추적한다.
따라서 그를 상대해본 정치인들과 관리들은 미국인 기자들보다도 그를 더 무서워하여 면담신청 등을 이런저런 이유로 따돌리려 하지만 결국 굴복하고 만다.
명성을 얻기 시작하면서 그에게는 각종 정보를 제공해주는 미국인이 늘어나 폭로기사를 쓰는데 큰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독자들의 신임도 그만큼 두텁다는 얘기다.
30년의 기자생활 중 25개의 크고 작은 언론 상을 받았다는 이씨는 74년 미3대 언론상중의 하나인 내셔널 헤들라이너 상의 영광도 차지했으며 가장 보람있었던 일로는 이철수 사건을 파헤쳐 억울하게 희생될 뻔한 동포를 구한 경우를 들었다.
내셔널 헤들라이너 상은 74년 캘리포니아주 의회의원들이 자신들의 이권을 위해 은퇴 후 연금을 부정하게 받을 수 있도록 교묘하게 입법한 것을 발견, 이를 폭로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다시 법을 개정케한 유명한 「골든 돔」 (The Golden Dome) 기사연재로 받은 것이다.
웨스트 버지니아주 선거 때의 대량부정 매표사건을 파헤치고 탄광촌 광부들의 참상을 보도, 이들의 생활여건을 개선시키는 등으로 명성을 날리기도 했던 그는 지금도 한달 평균 1∼2건씩 각종 의혹과 부조리를 고발하고 있다.
모국에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계기가 된 이철수 사건취재로 미 최고의 언론상인 퓰리처 상 수상후보에도 올랐던 그는 정의감에 불타 불의와 부정을 참지 못하는 성격으로 취재과정에서 목숨의 위협을 느낀 적도 한 두 번이 아니다. 특히 이철수 사건을 파고들기 시작하면서 조직폭력의 협박 때문에 『하루하루를 마지막으로 생각하면서 뛰었다.』 는 이씨는 『잘못 뒤엉킨 일을 바로 잡을 때 느끼는 희열은 어쩌면 허영일지도 모른다.』 고 했다. 환갑에 가까운 나이에도 현장을 버리지 않는 그의 집념은 이 같은 심리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기자가 이철수 사건을 깊이 파헤치게 된 것은 실로 우연이었다.
이씨가 이철수 재판기사를 처음 읽은 것은 77년5월. 철수씨는 73년6월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발생한 중국인 갱단 두목피살사건의 용의자로 복역 중 77년 유색인종을 멸시하는 백인계 죄수들이 자신을 살해하려해 정당방위로 상대방을 죽여 또 다른 살인죄로 기소 됐었다.

<퓰리처 상 후보 올라>
그에 관한 재판기사 가운데 그가 한국인이라는 내용은 없었지만 성과 이름의 발음으로 보아 한국인임을 직감한 이기자는 「철수」가 자신의 조카이름과 같은데서 관심을 갖게됐다.
이기자는 철수씨의 백인 변호사와 여러 차례 접촉을 시도했으나 끝내 실패하자 이 사건이 어떤 의혹에 가려져 있음을 느끼고 파고들기 시작했다.
주말마다 신문사에서 1백60km나 떨어진 사건현장까지 찾아간 이기자는 수십 명의 현장목격자를 찾아내기도 했으며 이때 조직폭력배들에게 납치 당할 뻔하기도 했다.
78년1월29일 새크라멘토 유니언지 1면 머리에 『이철수 사건의 내막』이라는 첫 기사가 나가기까지는 6개월이 걸렸다.
그의 보도는 많은 미국인을 설득시켰을 뿐만 아니라 당시 40만 재미 한인교포들에게 커다란 충격과 감동을 안겨주었다. 이 기사가 계기가 되어 이철수 구명 후원회가 구성되고 재판비용의 모금운동도 활발히 전개돼 83년3월 철수씨는 살인누명을 벗고 석방될 수 있었다.
웨스트 버지니아대와 일리노이대 등에서 신문학을 전공한 뒤 54년 테네시주의 킹즈타임즈 앤드뉴스지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한 3년 뒤 웨스트 버지니아의 찰스턴가제트지로 옮겨 12년간 일했다.
그는 당시 이 신문의 사장이 오늘날의 그를 있게 한 인물이라고 말했다.
남달리 정의감이 투철한「네드·칠턴」사장은 그 무렵 억압받던 흑인들의 어려움과 주 집권당인 민주당의 부정 부패를 그에게 파헤쳐 보도록 임무를 주었다는 것.
70년 지금의 신문사로 옮겨 15년째를 맞고있다.

<연봉 3만5천불>
그는 79년부터 2년간의 유급휴가를 받아 로스앤젤레스에 살면서 교포를 대상으로 한 영자지「코리아타운」을 스스로 발간하기도 했다. 처음 24페이지 짜리 주간으로 시작된 이 신문은 독자가 적어 격주간·월간으로 변하다가 요즘은 계간으로 나오고 있다.
한인교민들이 많이 구독할 것으로 예상했다는 그는 그러나 이 같은 그의 아이디어가 너무 시대를 앞선 것이었다고 스스로 진단했다.
미국 한인사회의 현실에 대해 이씨는 국민은 개개인으로 보면 유대인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했으나 반면 우리의 적은 바로 우리자신이라고 했다. 뭉치지 못하는 분열 상이 가장 큰 문제라는 것이다.
『나라가 분단됐다느니 국내의 문제가 어떻다느니 하는 얘기를 할 때는 지났다. 이제는 우리의 권리 신장과 사회발전을 위해 뭉칠 때가 됐다』 고 한인사회의 현실을 개탄하면서도 그는 교민사회의 앞날은 밝다고 낙관한다
1백50년이 된 중국·일본계 이민들이 대부분 노동으로 시작한데 반해 우리의 이민1세는 거의 사라지고 70년대에 이어진 본격적인 이민은 대부분 어느 정도의 학력과 실력을 갖춘 사람으로 구성돼 있어 발전이 상대적으로 빠르리라는 것이다.
58년 찰스턴 가제트지의 경찰기자 시절 미국여자와 결혼한 이씨의 1남2녀 중 장남은 초급대학에 다니면서 용접공으로 일하고있다.
간호원의 전직을 갖고 있는 부인 「페기· 플라워」 여사는 집안 일만 하다가 신문 코리아타운 발행 후 경제적인 어려움이 닥치자 수년 전부터 화장품 방문 판매 일을 시작, 가계를 돕고 있다.
이씨의 현재 연봉은 3만5천 달러로 신문기자의 최상위수준.
여건만 허락한다면 한국에 돌아가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살고 싶다는 이씨에게서 조국에의 진한 향수를 읽을 수 있었다.<새크라멘토=정봉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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