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내 기타는 잠들지 않는다 5. 소년 가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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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한국전쟁 때 서울을 점령한 북한 인민군.

아버지는 고모를 시켜 충북 진천에 땅을 사서 집을 짓고 광에 쌀가마를 가득 쌓아뒀다. 진천에 정착하자 고모부는 매일 두어 가마씩의 쌀을 지게에 얹어 가져갔다. 광이 비자 고모는 왕래를 끊었다. 알고 보니 우리 집과 땅도 고모 명의로 돼 있었다. 자존심이 강한 부모님은 그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일로 속이 탄 탓인지 두 분은 동시에 몸져 누웠다. 졸지에 나는 여섯 살 아래의 남동생 수현, 갓난아기였던 여동생 현자까지 돌보는 소년 가장이 됐다.

수입이 없는 데다 약을 구할 방법조차 없었다. 간호라고 해봐야 땔감 나무를 구해 와 이부자리를 따뜻하게 하고, 수건을 적셔 머리에 얹어드리고, 물을 떠드리는 게 전부였다. 답답할 뿐이었다.

배고픔도 처음 알게 됐다. 집 앞 방앗간에서 밀을 빻고 남은 겨를 얻어다 시루에 쪘다. 깔깔한 겨가 뱃속으로 들어가면 변을 볼 때 찢어질 듯 아팠다. 봄이면 쑥을 뜯어 겨와 같이 빻아 쑥떡이랍시고 쪄 먹었다. 배추밭에 흩어져 있는 시래기를 주워 죽을 쑤면 꿀맛이었다. 쌀밥은 하늘의 별 따기. 보리죽이라도 감사했다. 어머니 젖이 나오지 않아 현자에겐 귀하디 귀한 곡물을 아껴 미음을 쑤어 먹였다. 그러나 결국 힘없이 눈을 감았다.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하다못해 단백질이 충분한 콩이라도 섞어 먹였으면 살지 않았을까….

가슴에 맺힌 일은 또 있었다. 그땐 몰라도 너무 몰랐다. 아버지가 뭘 잡수시는 걸 본 기억도 없다. 자식들 먹이려고 당신은 곡기를 끊은 거였다.

한국전쟁이 터졌다. 우리가 살던 백곡면은 진천 옆 산 너머에 있었다. 진천은 남쪽에 산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었다. 북에서 밀고 내려오던 인민군을 막아내기 좋은 지형이었다. 전투는 일주일이나 계속됐다. 산에 올라가 진천군을 내려다보며 매일 전쟁 구경을 했다.

'다다다다… '

밤이면 아군의 기관총에서 발사되는 불빛이 불꽃놀이를 하는 것처럼 멋졌다. 인민군은 '따쿵 총'을 쐈다. 한 발 쏘고 다시 한 발을 장전해 발사하면 총소리가 '따쿵'하고 나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미군의 폭격 기술도 대단했다. 전투기는 수직으로 꽂히듯 내려왔다가 폭탄을 쏟아붓고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 무기는 우리가 훨씬 우수한 것 같은데 왜 힘없이 밀리는지 이해가 안 됐다.

결국 진천군도 함락됐다. 군대가 물러난 뒤 공산당은 우리 동네까지 들어와 세뇌 공작을 시작했다. 동네 청소년을 전원 밤나무 그늘 아래로 끌어모았다. 어린 나는 교육 대상이 아니었지만 밤나무 위에서 벌거벗은 채 구경했다.

공산당 간부들은 연설로 사상 교육을 했다. 그에 앞서 '김일성가'를 먼저 가르쳤다. 밤나무 위에서 그 모습을 보던 나는 속으로 '노래 참 잘 지었다'는 생각을 했다. 가락과 가사가 재미있고 부르는 이의 가슴에 뭔가를 불러 일으키는 힘을 갖고 있었다. 처음엔 거부감을 보이던 마을 형들은 공산당 간부들에게서 노래 몇 곡 배우더니 청소년 의용군으로 자진 입대했다. 공산당원들은 양민을 해치지 않고 잘 대해 줬다. 사람들은 그들의 시스템에 저절로 말려들었다. 그들은 전쟁을 철저히 준비했던 것이다.

신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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