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B 의장, 경제대통령 시대 끝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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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영웅이 지배하던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시대는 끝났다." 미국의 경제주간지 비즈니스위크 최근호(11월 7일자)는 내년 2월부터 벤 버냉키 지명자가 이끌어갈 미국 FRB를 이같이 평가했다. FRB 의장이 '세계 경제 대통령'으로 떠받들어지는 시대는 폴 볼커(1979~87년)와 앨런 그린스펀(1987~2006년)으로 끝나고, 벤 버냉키는 움츠러든 FRB의 수장직에 만족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즈니스위크는 미국을 둘러싼 경제환경의 변화가 이 같은 결과를 초래할 것으로 분석했다.

우선 국제 금융자본의 힘이 어느 때보다 강해지면서 FRB가 통제하기 쉽지 않아졌다는 것. 또 엄청난 규모의 미국 재정적자를 해외 투자자들의 돈으로 메우고 있어 금융시장에서 미국의 목소리가 약해질 수밖에 없다. 이는 FRB의 영향력 축소로 나타날 것이란 얘기다.

버냉키가 위기상황에서 그린스펀보다 더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비즈니스위크는 내다봤다. 그린스펀은 가장 힘 있는 은행의 수장이란 사실을 무기 삼아 과감하고 독립적인 정책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버냉키는 미국 국채를 대량으로 사고 있는 유럽.일본.중국의 중앙은행에 도움을 요청해야 할지 모른다.

이미 금융시장에서는 FRB의 지위가 흔들리는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FRB는 지난해 6월 이후 11차례나 단기금리인 미국 연방기금금리를 올렸다. 그러나 그린스펀 스스로 수수께끼라고 말한 것처럼 장기금리인 미국 국채 10년물 금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FRB의 의도대로 시장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비즈니스위크는 "이 같은 수수께끼가 앞으로 더 많아질 것이고, 버냉키는 더욱 당혹스러울 것"이라고 했다.

이 잡지는 또 버냉키의 학문적 성향이 FRB의 영향력 축소를 부채질할 것이라고 했다. 버냉키는 평소 "FRB가 경제 현황에 일일이 간섭하지 않고, 인플레이션을 막는 데 주력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이 경우 그린스펀 시대와 달리 FRB의 역할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상당수 경제학자와 월가 전문가들도 FRB의 역할 축소를 주장하며 압박하고 있다. 여기에는 그린스펀에 대한 반발심이 어느 정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린스펀은 사회보장제도의 개혁부터 석유 가격에 이르기까지 견해를 밝혀왔다. 하지만 정확한 자료보다는 통찰력과 육감을 바탕으로 한 그의 정책이 문제를 야기했다는 게 비판론자들의 주장이다.

버냉키의 경험 부족이 FRB를 위축시킬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뉴욕 타임스는 30일(현지시간) "버냉키가 이론과 현실의 괴리를 어떻게 메울지 미지수"라고 했다. 실물주의자인 그린스펀에 비해 버냉키가 이론주의로 흐를 수 있다고 우려했다.

비즈니스위크는 버냉키가 정부에 몸담은 시간이 짧고, 그린스펀과 달리 시장 경험이 없다는 점이 불안 요인이라고 했다. 또 그가 통화정책에 평생을 매달려온 전문가이긴 하지만 감세(減稅)와 같은 정치적 판단이 개입되는 경제 문제에 대해선 무지하다고도 했다. 비즈니스위크는 "버냉키가 그린스펀 시대에 만들어진 정책의 연속성을 유지하겠다고 했지만 싫든 좋든 '초라해진 FRB'를 이끌게 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김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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