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진무구한 환상의 천국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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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샤갈」의 그림을 볼때마다 나는 유대인의 다음과 같은 격언을 떠올리곤한다.
『어리석은 자는 깨달음의 즐거움보다 그저 제소견만을 주장하는걸 즐거워한다는…』
「샤갈」이 유대인이어서 이구절이 떠오른다는건 아니다. 미술을 글로 쓰고 입으로 말하는 나의 직업의 맹랑함이 그의 그림을 대할적마다 절실해지기 때문이다.
「샤갈」은 많은것을 깨닫게해준다. 이렇고 저렇다는 글을써서 혹은 말로해서 깨닫게하는게 아니라 그야말로 깨닫는 그자체의 즐거움을 우리들에게 안겨준다. 무르익은 과실같은 다양한 기억(기억)들이 서로 어울리면서 빛무리를 형성하는 지상천국으로 우리를 유도한다.
몇년전에 「지붕위의 바이얼린」이라는 영화가 한국에서 개봉된적이 있다. 제정 러시아시대의 우크라이나지방에 거주하는 한 유대인마을의 생활상을 그린 슬프고도 아름다운 영화였다.
「샤갈」이 태어난 비데브스크는 그처럼 가난한 유대인마을이었다. 그가 태어날때 옆집에 불이 났고 밖으로 뛰어나온 산모는 문곁의 물통속에서 그를 낳았다고 파리의 「샤갈」은 자서전에서 회고하고 있다. 붉게 타오르는 불길을 등지고 자기는 첨벙하고 물속에 빠졌노라고…. 눈도 못뜬 갓난아이가 이런 광경을 기억할리 없다. 그러나 정말 그랬다고 그는 우긴다. 황당무계한 거것말이지만 그의 화면처럼 천진무구하고 즐거운 환상이다. 논리적인 진실성하고 충돌할만한 속임수지만 그러나 이 융통무의의 환상은 오히려 현실이라는 이름의 그 박정한 어른스러움을 때려치울 힘을 가지고 있다.
그가 자라난 비데브스크는 사방이 막막한 러시아의 전형적인 광야였다. 한줌의 판잣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가운데서도 유독 가난했던 창고지기의 집에서 그는 자랐으며 여덟남매의 맏아들이었다. 형상있는것의 재현을 금기로하는 유대교의 교의를 따라 방안은 거의 무장식이었다. 낡은 식탁 한모퉁이에 손바닥만한 가족사진이 놓여있는게 장식의 전부였다.
세계는 어린 「샤갈」의 마음속에서 자라나는 체액의 변용만큼도 다양하지 못했으며, 그런 주채꼴이면서도 야박하고 잔인하기가 한치의 에누리도 없었다.
예술은 현실과 가능성의 상극속에 있는게 아니라 현실의 변모속에 있다는걸 「샤갈」은 깨닫기 시작한다. 호랑이의 사납고도 절박한 야수성(현실성)을 한개의 말라비틀어진 곶감을 가지고 쫓아 버렸다는 한국민중의 지혜와 아이러니를 여기서 상기해도좋다. 「샤갈」의 황당무개한 아이러니는 그의 지혜로운 유머이며 존재의 기술이다. 그것은 생활의 기술은 아니다. 똑똑하고 야무지다는게 소용없다.
사랑하는 사람들, 꽃다발, 붉은 태양, 바이얼린을 켜는사람, 늙은 유대인, 이상한 동물들, 하늘을 나는 물고기 등은 그의 환상천국의 주민들이며 자유민들이다. 현실의 법칙은 여기서는 무용지물이다. 이 자율의 화면속에선 모든 주제들이 경쾌하게 멋부리며 뒤죽박죽으로 얽히는 삶의 환희를 연출하고 있다.
유머를 모르는 사람은 누에고치 속에 갇혀 있는 번데기와도 같다. 꿈은 바로 현실이 아니지만, 꿈을 모르는 사람은 충분한 의식을 가질 수없으며 생명의 진보와 존재에 무엇도 기여하는게 없다. 「샤갈」의 미술은 이러한 예술의 힘을 일깨워주며, 누에고치 속의 그 지루한 되풀이와 억눌림 속에서도 뜻밖으로 오색영롱한 나비가 날아나온다는 생의 비의를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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