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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장(兵長)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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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유없이 하라면 한다고 이병/일이란 일은 다 몰리는 일병/슬슬 지겨워 포상휴가만 노린다고 상병/잔병만 늘어 항상 열외인 병장." 사병 계급에 빗댄 우스개다. '작전 실패는 용납해도 고참 받들기에 실패한 병사는 용서받지 못한다'는 내무반 격언도 있다. 용감한 적보다 눈앞의 고참이 더 무서운 시절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전투력은 불가사의한 비밀로 여겨졌다. 최고 수뇌부의 전략 실패와 달리 하급 부대의 탄탄한 전투력은 연합군을 끝까지 괴롭혔다. 줄곧 5~7배의 적과 맞섰지만 주눅 들지 않았다. 연합군은 적군의 하급지휘관에 주목했다. "분대를 이끄는 독일군 병장과 하사관이 전투력의 핵심이다. 능력있고 사려깊은 이들은 사병들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고 있다." 포로 심문을 통해 얻은 결론이다.

독일군은 1년 이상 근무한 병사들 중 엄격히 능력에 따라 병장과 하사관을 뽑았다. 장교들도 임관 전 6개월간 사병들과 똑같이 훈련받고 생활했다. 하급지휘관은 자연스레 병사들과 한 몸이 됐다. 전투에선 맨 앞에 나서 유난히 희생자가 많았다. 장교와 사병을 분리하고 철저히 엘리트주의를 고집한 연합군과 달랐다. 권총을 빼든 연합군 장교들은 한발 뒤에서 "진격하라"며 병사들만 다그쳤다.

아예 사병 계급을 없앤 군대도 있다. 소련의 붉은군대[赤軍]와 중국 인민해방군은 '평등한 군대'를 내세워 장교와 사병으로만 구분했다. 장교들은 계급장을 눈에 띄는 곳에 붙이지 말라는 지침까지 내렸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했다. 지시와 통제가 먹혀들지 않아 희생자만 늘어났다. 적군은 2차 대전 때 독일군에 심장부까지 밀리고서야 계급을 부활시켰다. 인민해방군도 1979년 국경분쟁 당시 베트남군에 크게 얻어맞은 뒤 부랴부랴 사병 계급을 복원했다.

국방부가 새로운 병영문화를 위해 이병과 병장 계급 폐지를 검토 중이라 한다. 훈련병이 바로 일병을 달면 신참의 서러움이 사라지고, 병장이 없어지면 고참의 병폐가 근절된다고 믿는 모양이다. 장교들만의 탁상공론이 아닌지 모르겠다. 전투력과 사기에 미칠 영향부터 따져봐야 할 것이다. '진급이 유일한 낙'이라는 졸병들의 처지도 헤아려야 한다. 군대엔 '계급보다는 짬밥'이란 말이 있다. 병장을 없앤다고 짬밥순(順) 관행까지 사라질까.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