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자유당과 내각(3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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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자유당은 집권당은 아니었다. 신두영씨는 그점을 단언할수 있다면서 이렇게 진단했다.
『이박사는 파벌을 몹시 싫어했다. 이박사는 형식상 자유당의 총재였지만 자신이 자유당의 총재라는 의식은 전혀 없었고 단지 한국의 대통령이라는 공지를 갗고 있었다.

<당·내각 경이원지>
흔히 자유당이 정부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한 것처럼 보이지만 자유당 말기까지 정부의 중요인사에 있어서 자유당의 영향력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자유당은 자유당에서 장관을 내는것처럼 표방했는데 그것은 자신들의 귄위와 위신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장관들도 구태여 그런 맘들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아무리 자유당에서 지지해도 이박사가 싫어하면 그만둬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있었다.
가끔 장관들끼리 국무회의 석상에서 자유당을 좋지않게 얘기하는 것을 들었는데 자유당과 내각과의 관계는 한마디로 「경이원지」의 관계였다.
심지어 이기붕까지도 장관을 임명하는데는 자신이 없을 정도였고 단지 이박사에게 접근할수있는 이니서티브를 가지고 「개인적인」 추천기회를 가질뿐이었고 그것도 자유당의 입장은 아니었다.
그러나 장관들이 당의 영향을 받아 각부처나 국영기업체 인사에서 혼선을 일으킨적은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당의 인사방침에 의한것이 아니라 이기붕 개인의 영향때문 이었다. 그 예로 자유당에서 일하다 내각에 참여한 사람이 거의 전무하다는 사실로도 알수있다.
이박사가 정부수립초기 인사의 혼선에서 벗어나 인물을 골라 쓰기위해 노력한 시기에 「인물추천함」이 생겨났지만(결국 실패로 끝났다) 당시 자유당의 영향력이 행사될 수 있었다면 「인물추천함」같은 궁여지책이 생겨날리 만무였다.
자유당과 내각의 관계는 서로 체면을 지키고 생색을 내는데 그쳤지 자유당이 장관을 추천하거나 보호, 그만두게 할 실권이 전혀 없었다.
혼히 <이기붕씨가 하면 자유당에서 하는것이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기붕씨가 할수 있었던 역할은 <이박사도 같은 값이면 이 사람을 쓸것이다>해서 그런 사람을 몰라서 추천한 것뿐이다.
정부-자유당 연석회의는 중요정책을 서로 의논해서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정부가 자유당을 납득시키는 회의라고 보는것이 타당하다. 자유당시절 정부와 자유당은 잦은 연석회의를 가졌지만 별 중요한 의미는 없었다.
그랬지만 내각은 자유당의 영향권에 차츰 횝쓸려갔다. 자유당 핵심들은 특정인을 장관으로 올려세우는 일은 못했지만 장관의 평점을 낮춰 실각시킬수는 있었다. 대통령을 만나 정치문제를 말할수 있다는것 그리고 국회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 힘의 배경이었다. 후기 경무대비서로 행정처리를 도맡은 박찬일 비서는 경무대안의 이기붕의 첨병이었다.
이런 권력의 속성이 이기붕을 중심으로 자유당그룹과 경무대의 몇사람으로 하여금 대통령의 주변에 「인의 장막」을 치고 대통령으로 하여금 그가 통치해야 할 현실과 차단되게 만들었다. 그런 흐름을 말해주는 증언들을 옮겨보자.

<장관 추천할 힘 없어>
경무대비서였던 안모우씨의 회고 『당시 나는 법률비서로서 각부처의 국회제출법안이나 기타 결재서류를 헌법과의 관계 기존 법체제, 민주주의의 원리에 어긋나지 않는지를 검토해 이박사에게 보고했다.
이박사는 보고때 자주 나에게 <우리나라가 독재국가가 되어선 안된다>는 점과 <예산관계법안은 나랏돈을 쓰는거야. 내가 사인만하면 그대로 쓰게되니 주의해야돼. 돈쓰는데는 헙잡이 많은 법이야>라며 <이 두가지가 자네가 할 일이야>라고 주의를 주곤했다.
각부처의 서류결재때 신문에 보도된 정부비판기사등 세상물정을 보고하면 그 자리에서 <자네가 알아보게>라고 지시하기도 했고 때로 김간흥 이정석등 경무대 경찰서장에게 다시 지시했다.
이 보고는 뒤에 만송(이기붕의 아호)의 독주가 시작되면서 그만두게 됐는데 대통령에게 보고를 하면 그 보고한 사실이 경무대안 만송의 끄나불에 의해 서대문으로 전해지고 그것이 변질돼 다시 경무대로 보고되곤 했다.
특히 인사·예산문제등 서대문의 입장과 다른것들이 많은 잡음을 일으켰다. 자유당과 경무대의 노선이 자꾸 틀어지자 언젠가는 이박사가 내게 <기붕이가 자네때문에 자유당일이 안된다네>하고 이야기해 <저는 정치가가 아닙니다. 비록 서대문과 의견이 다르더라도 대통령이 하셔야될 일이라고 믿어 보고한 것입니다>고 답한 적이 있다.

<서대문뜻대로 처리>
이러자 경무대안의 모씨까지 <당신의 보고가 옳으나 이박사가 노쇠해서 좋지 않은 일을 보고하면 흥분하니 보고를 하지 말라>고 제지했다.
결국 55년쯤부터는 서대문의 뜻대로 모든 일이 거침없이 처리되게 되었다.
신두영씨의 회고.
『오재경 공보실장은 처음 이기붕과 가까왔다 58년 국회의원 선거때 오실장은 이기붕 박마리아와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선거 그렇게 하시면 안됩니다>고 선거부정을 비판했다.
그뒤 오실장이 이기붕을 찾아가도 박마리아가 중간에서 만나게 해주지 않았다.
그후 국무회의 석상에서 자유당얘기가 거론됐을 때 오실장은 <자유당에서는 자유당이 이박사를 지지하니까 이박사가 대통령을 하는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만두면 자유당 간판은 하루아침에 어디로 갈 것이다>고 했다.
그런데 그 얘기가 이기붕에게 들어가서 사이가 아주 나빠졌다.
그러던 어느날 경무대비서실에서 <공보실장을 바꾸니 서류를 준비하라>고 연락이 왔다. 오실장을 만나 그 사실을 말하니 본인도 모르고 있었다.
오실장은 온건해서 대언론관계에 부드러웠는데 후임 전성천은 적극적인 사람이었다. 오실장이 있었다면 경향신문 폐간조치는 나오지 않았을지 모른다.
경무대 비서 황규면씨의 회고. 『부산피난시절 이박사가 어느날 당시관저 경비를 하던 이정석에게 <나가서 물가를 좀 알아보고와. 피난땐데 물가가 너무 오르면 국민들 생활이 말이 아니야>고 지시하자 이씨가 <제 임무는 각하의 경호입니다. 그런 일은 비서를 시키십시오>라며 불응하자 불쾌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다시 비서를 불러 지시하기도 했다.
이처럼 이박사근 업무의 분담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지않고 적당히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시키기도 했지만 결국 훗날엔 모든 보고가 다른 곳을 거쳐 윤색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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