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이념의 옷" 벗고 근대화 시동|5기 전인대 폐막…2천년대 청사진 제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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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지난 11월26일 열렸던 중공의 제5기 전국 인민 대표 대회 (전인대=국회) 제5차 대회가 15일간의 일정을 마치고 10일 폐막됐다.
이번 5차 회의는 새 헌법을 채택, 정치 개혁을 시도하고 6차 5개년 계획을 통해 2000년을 향한 경제 건설의 청사진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새 헌법은 모택동의 계속 혁명론을 법적으로 완전히 청산하고 호요방-등소평 체제가 추진해온 근대화 노선을 전면에 부각시킴으로써 앞으로 중공의 진로를 보여주고 있다.
정치·경제·군사 등 모든 부문에서 이데올로기적 색채가 퇴색하고 그 대신 법치주의, 국가주의, 합리주의, 경제 우선 원칙이 강조되고 있는 점이 특히 주목된다. 당에 대한 헌법의 우위를 선언한 것이라든가, 국가 주석제를 부활한 것, 국가 군사 위원회를 신설한 것 등은 인민 해방군을 「당의 군대」에서 「국가의 군대」로 성격을 바꿀 채비를 갖춘 것으로 새 헌법의 특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중공 사회주의의 상징이었던 인민 공사는 새 헌법에 따라 사실상 해제기를 걷게 됐다. 이제까지 정치·경제·군사·교육의 대권을 쥔 정치 조직에서 이데올로기적 성격이 배제된 순수한 경제 조직으로 기능이 축소됐다.
외국 기업에 문호를 개방하고 공장이나 농촌에 자치 관리 제도를 도입, 계획 경제와 시장경제의 공존을 허용한 것 등은 2000년대의 도약을 위한 경제면에서의 체제 정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6차 5개년 계획은 국방비 지출을 대폭 억제해 5차 5개년 계획의 전체 예산에 대한 국방비지출 비율 16.5%를 14.5%로 낮추었으며, 계획 기간 중 1만5천명의 해외 유학생을 파견, 뒤떨어진 기술 향상을 위해 인재 양성에 힘을 기울일 것을 표방했다.
당보다도 국가, 이데올로기보다도 경제 생산성을 중시한 이같은 진로의 전환은 그 성공을 위해 필연적으로 의식의 개혁을 요구하게 마련이다. 이번 전인대 5차 회의를 계기로 중공 당국은 당의 정풍 운동을 강화해 현재의 노선에 비판적인 일부 극좌 세력을 일소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최근의 인민일보는 『공산당이라 하더라도 헌법을 초월할 수는 없으며, 당이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생각은 잘못이다』는 사실을 게재, 당 우위의 사고 방식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한편, 『부르좌 계급이라도 일에 정통한 과학 기술자는 과대 망상증에 걸린 고참 당원보다 10배나 귀중하다』는 내용의 논문을 게재, 의식 개혁을 내걸었다.
호요방 당 주석은 내년 후반부터 3년간에 걸쳐 당내 정풍 운동을 벌이겠다고 이미 밝힌바 있으나 일부에서는 이번 전인대를 계기로 그 시기가 앞당겨져 내년 초부터는 본격적인 운동이 시작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번 정풍 운동을 통해 중공은 정부 및 당 간부에 대한 6개월 간의 재교육 실시, 전 당원의 재등록, 자치성 등 지방 조직에 대한 행정 개혁의 실시, 지방의 좌파 간부들에 대한 숙청을 단행할 것으로 보인다.
정풍 운동의 타개와 행정 개혁은 중앙상 총부에서 확립된 호요방·등소평 등 주류파의 지도력을 전국 말단 조직으로까지 확대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 운동의 성패는 현 지도 체제가 장기 안정 정권으로 정착하느냐를 가늠하는 분수령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새 지도부의 정치 이념은 이미 금년 봄부터 시작된 국무원의 행정 개혁, 9월의 공산당 대회 (12전 대회)를 통해 중앙에서 뿌리를 굳히고 있으나, 군·당의 하부 조직에서는 아직도 이에 저항하는 문혁의 잔당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지난 8월만 해도 군 기관지 해방 군보에 『부르좌적 자유화의 관점을 선전하는 지도자가 있다』는 내용의 현 체제를 공격하는 논문이 실렸었다. 해방 군보는 즉각 이 논문이 『잘못된 논문이었다』고 자기 비판을 했으나, 공산당의 절대성을 부정하는 등소평 노선에 깊은 불만을 품은 좌파 세력의 존재를 보여주는 사전이었다. 이 때문에 중공 전문가들 중에 앞으로 전개될 정풍 운동을 등소평 최후의 투쟁이라고 규정짓는 사람도 있다.
이번 헌법 개정을 통해 부활된 국가 주석과 신설된 국가 중앙 군사 위원회 주석 등은 요직 인선이 이루어진 이유를 문혁파의 도전과 관련시켜 보는 의견도 있다.
이번 대회에서는 헌법·제6차 경제 개발 계획 외에도 전인대 조직법·국무원 조직법·각급 지방 정부 조직법 등이 채택됐으며, 최고 인민 법원 및 최고 인민 검찰원의 합동 보고, 제6기 전인대 대표 정원과 선출 방법 등도 승인됐다.
78년에 선출된 제5기 전인대는 이번 5차 회의를 끝으로 활동을 마치고 내년 4월말까지는 새로 제6기 전인대 대표가 선출돼 6월께는 제1차 회의가 열릴 예정이다.
6기 전인대 1차 회의에서는 이번 대회에서 미루어진 국가 주석·부주석·국가 중앙 군사위 주석, 그리고 이번 대회를 끝으로 은퇴할 것이 확실한 섭검영 전인대 위원장의 후임 등 주요 인선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의 정세로는 새 국가 주석에 이선념 당 중앙 정치국 상무위원, 부주석에는 주은래의 미망인 등영초 전인대 상무위 부위원장이 각각 선출될 것으로 보이나 요양중인 이선념의 건강 상태에 따라서는 등영초가 국가 주석에 취임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신설된 국가 중앙 군사위 주석에는 등소평의 취임이 거의 확실시되고 있다. 섭검영의 후임으로는 팽진 전인대 부위원장이 자리를 물려받을 것으로 보인다. <동경=신성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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