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 한옥과 사랑에 빠진 영국 언론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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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 데이비드 킬번(왼쪽)과 부인 최금옥씨가 자신들이 사는 한옥 난간에 기대 환하게 웃고 있다. 위쪽 사진은 김기덕 감독의 영화 ‘빈집’의 한 장면. 킬번 부부는 촬영 장소를 물색하던 김 감독에게 기꺼이 집을 제공했다.

1987년 어느 여름날. 미국과 유럽에서 발간되는 몇몇 광고.마케팅 전문지의 도쿄.서울 특파원으로 일하던 영국인 데이비드 킬번(62)은 서울 계동에서 난생 처음 전통 한옥을 보고 한눈에 반했다. 이미 런던과 도쿄에 집이 있었지만 '이렇게 멋진 집이라면 꼭 한 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다음날 한국인 부인 최금옥(50)씨를 앞세워 대표적 한옥촌인 가회동으로 갔다. 다짜고짜 대문을 두드리며 "집을 팔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다. 네 번째 들른 집에서 계약이 이뤄졌다.

"보자마자 (그 집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아내가 스무 채는 더 보고 결정해야 한다고 했지만 나는 '내가 원하는 집이 바로 여기'라고 말하고 그 자리에서 계약금을 치렀습니다."

사실 그는 '여행 가방이 집'이라고 여겼던 사람이다. 광고업계에서 15년, 언론계에서 20년을 종사하면서 전세계 60여 개 국을 바쁘게 돌아다니며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옥을 구입한 뒤론 삶이 달라졌다. 우선 한국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났다. 틈만 나면 집을 가꾸고 손봤다. 친구를 집으로 초대하는 일도 잦아졌다. 90년 일본 ANA항공의 잡지 '윙스팬'에 한옥을 소개하는 기사도 썼다. 2001년부터는 한국에서 세계의 차(茶)를 판매하는 사업도 하고 있다. "한옥에 오래 있고 싶어 일본이나 스리랑카에서도 할 수 있었지만 한국에서 하게 됐다"고 말했다.

-한옥에 빠지게 된 이유는.

"풍수에서 말하는 일종의 정기랄까, 힘 같은 게 느껴져요. 요즘 들은 얘기지만 가회동이 기가 몹시 센 동네라고 하더군요. 궁궐 자리였는데 (터가) 좁아서 못 지었다고. 그 특별함을 나도 느낀 겁니다."

-외국인으로서 살기에 불편하지 않은가.

"전기설비와 온돌을 고쳤어요. 부엌과 화장실도 개조했고. 그 외는 전통식 그대로 유지하며 약간씩만 손봤어요. 조언을 받고 싶었는데 마땅한 전문가가 없었어요. 경복궁과 다른 전통 가옥을 찾아다니며 나름대로 (어떻게 손보는 게 좋을 지를) 연구했습니다."

그의 한옥에선 예스러움이 묻어난다. 용머리 기와며, 나무 창살, 해태상, 장이 담긴 장독대까지…. 방에는 침대도 없다. 방바닥에서 이부자리 생활을 하기 때문이다. 그의 집을 이리저리 둘러보다 보니 어쩐지 낯이 익다는 생각이 든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 '빈집'을 보신 적 있나요? 그 영화를 우리집에서 찍었어요."

영화 속 여주인공 이승연씨가 몰래 들어가 낮잠 자던 집, 외출에서 돌아온 집 주인 부부가 '몹시 피곤한 모양이니 깨우지 말자'고 소곤소곤 얘기하던 바로 그 집이다.

킬번은 그러나 요즘 속상하다고 했다. 전통 가옥들이 마구잡이 개조로 인해 훼손되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에서는 (전통 가옥의) 건물 내부를 바꿀 때도 허가를 받아야 해요. 벽을 새로 칠할 때도 원래 느낌이나 성질을 바꿀 수 없도록 하고 있고요. 그런데 여기서는 개조한다면서 마구 굴착하고 파괴해요."

그가 최근 서울시와 종로구청을 상대로 가회동 난개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이유다.

킬번과 최씨는 87년 결혼했다. 그 1년 전 최씨가 런던에서 유학하던 중 학비를 벌기 위해 일했던 일본음식점에 킬번이 들른 게 인연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둘 사이에 자식은 없다. 최씨는 "너무 바빠 아이가 있었으면 큰 일 날 뻔했다"며 웃었다.

글=고정애 기자, 사진=변선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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