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43)<화맥 인맥-제76화>(62)국회서 미술논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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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나와 이순석·김병기씨 등 한국미술가협회 대표들은 여당 국회의원 앞에서 우리들의 의사를 개진할 겨를도 없이 납작 당하고만 나왔다.
그들은 왜 대한미협을 분열시켰느냐고 나무랐다. 분통이 터졌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우리들은 국회의원들에게 당한 내용을 전체회의에 보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회원들은 모두 격분해서 어쩔 줄 몰랐다. 대한미협에서 여당을 업고 싸움을 걸어왔으니 응수해야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국회에도 여당이 있고 야당이 있으니 한국미술가협회는 야당에 지원을 요청해야한다느니, 여당 국회의원들이 왜 일방적으로 한국미술가협회만 몰아붙이는지 그 배경부터 알아봐야 한다느니 의견이 분분했다.
회의에선 먼저 배경을 알아보고 나서 투쟁방법을 의논하자고 결론을 내렸다.
이리저리 사람을 대서 알아보니 우리들을 조사한 이존화·표양문·손문경 의원이 대한미협 측의 불재(윤효중)와 각별한 사이였다.
뿐만 아니라 불재는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을 만든 사람이어서 그 당시만 해도 속된 말로 상당한 끗발이 있었다.
불재는 동경미술학교 조각과를 졸업, 이미 조선시대 이름을 떨친 조각가였다.
본시 활동적이고 매사에 적극적인 불재는 부산 피난 중 대한미협에 적극 협력, 춘곡(고희동)의 환심을 샀다.
그가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을 제작하느라 빈번히 경무대에 드나들면서 여당간부와도 잦은 접촉을 가졌다.
원래 사교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던 불재는 주위에 많은 사람을 거느렸다.
그 때만 해도 6·25사변 뒤끝이어서 예술가들이 땅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터였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불재는 생활도 넉넉했지만 이승만 대통령 동상을 만들어 거액(1억 3천만환)을 받아 이 돈으로 삼선동에 3천여 평의 땅을 마련, 집도 짓고 주위사람를 돕기도 했다.
이 무렵 명동을 나갔다가 불재의 술을 얻어먹지 못한 사람(특히 화가·문인·조각가)은 바보소리를 들을 만큼 술 인심도 후했던 사람이다.
그러니 자연히 사람도 모으고 영향력도 행사할 수 있었다.
반면에 우석(장발)은 동경미술학교서양화과를 마치고 미국에 건너가 콜럼비아대에서 미술 및 미술사를 전공한 엘리트-.
해방직후 서울시 학무국장으로 서울대 미술대학을 만드는데 산파역할을 했고 뒤에 미술대학장을 맡아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성질이 깐깐해서 외곬으로 나가는 고집장이였다. 해외파여서 새로운 미술사조에도 밝아 무엇 하나 꿀리는게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서울대를 장악하고 있어 그게 한국미술가협회를 이끄는데도 강점으로 꼽혔다.
불재와 우석이 특별한 이유 없이 반목의 사이가 된 것은 대한미협과 한국미술가협회의 분쟁에 기인한 것이다.
한국미술가협회는 여러가지로 알아본 뒤 우석이 당시 야당의 지도자였던 장면씨의 동생이라는 점과 불재가 그 때 여당이던 자유당과 정부의 고급관리를 싸고돌아 한국미협이 호소할 곳은 야당밖에 없다는데 의견을 같이 했다.
그래 문교부 차관실에서 조사를 받고 나온 한국미술가협회의 이순석·김병기씨와 내가 야당 국회의원으로 문교분과위원회에 소속돼있는 깐깐한 선비정치가 운재 윤제술씨와 청렴하기로 소문난 이태용씨를 만났다. 동아일보 뒤 2층 다방에서 두 의원을 만나 우리들은 문교부 차관실에서 일방적으로 당한 일, 전시회장소 못 빌린 일, 대한미협에서 갈라선 이유 등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분들도 『그럴 수가 있느냐』고 분개했다. 우리들은 거듭 『대한미협이 여당을 업고 한국미술가협회를 공격한다』고 호소, 두 의원에게 도움을 약속 받았다.
이리하여 대한미협은 여당의 지원을, 한국미술가협회는 야당의 도움을 얻기에 이른 것이다. 미술단체의 분규는 국회문공위에 들어와 여야의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대로 가다가는 자칫 여야싸움이 될 기미마저 없지 않자 문교부가 국회 문공위원을 초대, 반도호텔에서 미술인 전체회의를 소집하고 화해무드를 조성했지만 이 같은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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