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안 통했던 고려인 … 아들아, 음악이 우릴 살릴 거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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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 트럼펫·비올라를 연주하는 바실리 강(오른쪽)과 안톤 강. 강제 이주와 박해의 역사를 가진 고려인 3·4세 부자다. 이들은 “한국에서 함께 연주할 때 가장 재미있고 행복하다”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장면 1. 1970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영락없는 동양인 외모의 10살 아이가 러시아 아이들 틈에서 학교를 다녔다. 아이는 한국말 밖에 할 줄 몰랐다. 허구한 날 친구들과 싸웠다.

#장면 2. 1999년 서울

 러시아인처럼 보이는 10살 소년이 초등학교에 다녔다. 한국어는 전혀 할 줄 몰랐다. 친구들은 그를 놀리고 무리에 끼워주지 않았다.

 두 장면은 부자(父子)에게 일어난 일이다. 트럼펫 연주자 바실리 강(54)은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한인촌에서 태어났다. 한국말만 쓰다가, 10세에 가족 전부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했다. 29년 후의 서울엔 그의 아들이 있었다. 러시아인 아내와 낳은 셋째 아들 아르촘(25)이다. 아이는 아버지가 러시아에서 겪었던 일을 서울에서 비슷하게 다시 겪었다.

 바실리의 가정사는 고려인의 굴곡진 운명을 잘 보여준다. 바실리는 고려인 3세다. 그의 할아버지가 150년 전 러시아 연해주로 건너간 1세대다. 고려인들은 스탈린의 분리정책에 의해 37년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 이주당한다. 91년 옛 소련연방이 붕괴한 후 고려인 50만 명은 현재 아시아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다.

 그 중 한 명인 바실리는 트럼펫 연주자다. 97년부터 2006년까지 KBS교향악단의 수석 단원으로 활동했다. 그의 둘째 아들 안톤(31)은 비올라 연주자다. 현재 서울시립교향악단의 단원이다. 바실리는 “아들에게 ‘반드시 음악을 하라’”고 어려서부터 주문했다고 한다. 나머지 두 아들은 지금 다른 일을 하지만, 어린 시절 플루트·첼로를 시켰다.

 바실리는 다시 한 번 “안톤은 꼭 음악을 해야 했다”고 말했다. 왜일까. “음악은 말이 안 통해도 할 수 있으니까.” 두 번째 이유는 “연주여행을 위해 어디든 자유롭게 갈 수 있어서”다. 바실리는 다시 강조했다. “150여 년 동안 고려인들은 어디에서도 말이 잘 통하지 않았고, 강제로 옮겨다니며 살아야 했다”고. 타슈켄트에서 서울까지 수천㎞에 이르는 바실리의 삶의 이동거리를 훑어봤다.

 ◆타슈켄트 → 페테르부르크=바실리의 어머니는 교육열이 강했다. 아이들을 모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가르치겠다는 생각에 러시아로 갔다. 바실리는 아버지가 즐기던 악기, 가르모시카 연주자가 되고 싶었다. 반도네온과 비슷한 러시아 전통 악기다. 하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의 입학 시험을 본 날, 인생이 바뀌었다. 트럼펫 선생이 “입술 모양과 체격이 딱 트럼펫 연주자”라며 데려간 것이다. 그는 21세에 키로프 오케스트라에 입단해 전 세계 연주 여행을 다녔다.

 그리고 아들에게도 악기를 쥐어줬다. 안톤은 “어린 시절 아버지는 연습 시간을 일일이 체크하는 엄격한 선생님이었다”고 기억했다. 그는 국제 콩쿠르에서 상을 타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을 수석으로 졸업했다.

 ◆페테르부르크 → 서울=아버지 바실리의 마음에 서울이 박힌 것은 95년이다. 키로프 오케스트라와 서울 연주를 했던 해다. 바실리는 “아버지가 타계하시면서도 ‘고국에 가고 싶다’고 했던 생각이 났다”며 “한국에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졌다”고 말했다. KBS교향악단에 입단하게 된 계기다.

 2003년엔 안톤도 서울로 왔다. 아버지가 있는 KBS교향악단의 오디션에 합격했다. 그는 “러시아 오케스트라에도 갈 수 있었지만 한국에 오고 싶었다. 내 절반은 한국인이고, 한국 문화가 편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현재 러시아 마린스키 극장의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한다. 하지만 아들은 지금껏 한국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하고 있다. 결혼도 한국 여성과 했다.

 안톤은 “나는 한국에서 러시아인, 러시아에서 한국인으로 취급된다”며 “고려인에 대해 사람들이 잘 알게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두 사람은 고려인의 역사를 알리기 위해 지난 6일 한 무대에서 연주했다. 재외동포재단이 주최한 고려인 이주 150주년 무대였다. 연주곡은 ‘백만송이 장미’. 러시아·한국에서 모두 유행한 가요다. 두 나라 선율의 특색이 묘하게 얽힌 이 노래에 고려인의 삶이 겹쳤다.

글=김호정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고려인=1864년 함경북도 농민 13가구가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했다. 이들은 일제강점 기 대일항쟁의 선봉에 섰다. 하지만 일본군이 철수한 1922년 이후엔 옛 소련 정부의 박해를 받았다. 일본첩자가 고려인을 통해 침입한다는 구실이었다. 스탈린은 37년 고려인 18만 명을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로 강제이주시켰다. 91년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와 한국으로 나뉘어 이주했다. 현재 한국에 취업한 고려인은 2만 명으로 추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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