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가 있는 아침 ] - '수묵 산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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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선태(1960∼ ), ‘수묵 산수’

가창 오리떼 수십만 마리가
겨울 영암호 수면을 박차고
새까만 점들로 날아올라선
한바탕 군무를 즐기시는가
싶더니

가만,
저희들끼리 붓이 되어
거대한 몸 붓이 되어
저무는 하늘을 배경으로
뭔가를 그리고 있는 것 아니신가
정중동의 느린 필치로 한 점
수묵 산수를 치는 것 아니신가.

제대로 구도를 잡으려는지
그렸다간 지우고를 반복하다
一郡의 細筆로 음영까지를 더하자
듬직하고 잘 생긴 山 하나
이윽고 완성되는가
싶더니

아서라, 화룡점정!
기다렸다는 듯 보름달이
능선 위로 떠올라
환하게 낙관을 찍는 것이 아니신가.

보시게나,
가창 오리떼의 군무가 이룩한
자연산 걸작
고즈넉한 남도의 수묵 산수 한 점은
그렇게 태어나는 것이다.


저 아름다운 수묵의 조화를 보라! 저거야말로 자연의 장엄이 아닌가. 수십만 마리가 수면을 박차고 올라 새까만 점으로 군무를 즐기는 동안 누구 하나 부딪쳐 다치지 않는다. 한 마리 한 마리가 모여 붓이 되어 산수를 치는 장관이라니! 사이가 만든 조화이자 장엄이다. 개인과 사회의 관계도 모름지기 이러해야 하지 않을까. 관계의 미학이란 사이의 미학이기도 하다. 사이가 무화될 때 관계는 때로 서로가 서로에게 억압일 수 있으니 말이다.

이재무<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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