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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강국, 항로 개척으로 이어가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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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지난 19일 서울 디지털 포럼-세계정보기술 정상회의에 참석한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은 "한국의 유비쿼터스는 금속인쇄술에 이어 전 세계가 두 번째로 한국에 크게 신세지는 커뮤니케이션 부문의 혁명적 성과"라고 극찬했다. 한국 경제를 이끌고 있는 정보기술(IT) 분야의 자랑스러운 현주소다.

오래전에 한국에서 철수한 주한 미7사단의 사단훈이 '이등은 아무것도 아니다(Second to None)'였다. 그러나 승전을 목표로 하는 어떠한 전쟁에서도 아군의 희생은 따르게 마련이고 패전(敗戰)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특히 약소국들은 취약한 국방력을 보완하기 위해 겹겹이 외교적 울타리를 치게 되는 것이다. 무역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세계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복수 이상의 일등상품을 보유해야 하고 다수의 후보 상품 개발에 총력전을 전개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은 전통적인 조선(造船) 강국이다. IT처럼 초정밀 기술집약형 산업이 주류를 이루는 오늘날, 쇠(鐵)를 다루는 전통산업이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국가경제 차원에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북구(北歐) 전성시대가 지난 지 오래고, 일본과 싱가포르가 한국과의 경쟁에서 물러났으며, 중국이 쫓아오고 있지만 아직 우리와는 시간적으로나 기술적으로 격차가 있다. 최근 현대중공업은 8억 달러짜리 해상 유전선을 제작해 주고 미국 모빌로부터 1000만 달러(약 100억원)의 보너스를 받았으며, 중국으로부터 여의도 63빌딩 높이보다 72m 더 긴 1만TEU급 초대형 유조선을 수주했다. 유가 급등으로 호황을 누리고 있는 중동의 카타르가 2010년까지 발주할 100억 달러 규모의 LNG선 44척을 대우.삼성.현대 등 국내 조선 3사가 싹쓸이했다. 선박건조 분야의 세계 1위가 자랑스럽다.

조선 분야의 세계 1위를 확고하게 다지기 위해서는 IT 분야 못지않게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중 하나가 대양항해(大洋航海) 시대를 대비한 사전 포석이다. 국경무역이 각광받고 항공화물이 급증하고 있지만, 대량 수송이 필수적인 세계시장에서 선박에 의한 해상운송은 부동의 절대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유조선과 컨테이너선의 대형화가 이를 말해 준다. 삼성중공업이 지난 연말 세계 최초로 1만2000TEU급 컨테이너선 건조기술과 설계를 마치고 해외 해운회사를 상대로 수주에 나섰다고 발표한 바 있는데, 이 배는 1만2000개의 20피트짜리 컨테이너를 한꺼번에 실을 수 있는 움직이는 섬이다. 기존의 해로(海路)는 곧 이들 초대형 선박을 수용할 수 없게 될 게 분명하다.

말라카 해협을 보자. 총연장 900㎞에 달하는 수마트라와 말레이 반도 사이의 이 국제 해로를 하루 평균 160척의 각종 선박이 지나고 있다. 특히 유조선의 경우 수에즈 운하의 3배, 파나마 운하의 5배에 달한다. 일본과 중국행 유조선의 80%와 99%의 한국행 유조선이 동북아의 목줄과도 같은 이곳을 통과한다.

통행 선박 급증에 따른 항로 체증과 상대를 가리지 않고 습격하는 해적 출몰도 골치 아프지만 선박의 대형화 추세에 따라 평균 25m에 불과한 수심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하고 있다. 이에 따라 태국은 오래전부터 일본과 중국을 끌어들여 폭 100㎞에 불과한 크라 협곡에 운하 건설을 타진해 왔다. 그러나 200억 달러가 넘는 막대한 공사비로 논의가 중단된 상태다.

인도네시아가 대안을 내놓고 있다. 칼리만탄과 술라웨시 사이의 마카사르 해협과 발리와 롬복섬 사이의 롬복 해협을 경유, 수마트라를 우회해 인도양을 가로지르는 대양(大洋) 해로가 그것이다. 이를 구체화하기 위해 마카사르 해협 중심부에 위치한 발릭파판항과 동갈라항을 제2의 싱가포르로 개발하는 연구 프로젝트가 한창이다. 우리 정부는 올 초 아체 지역의 쓰나미 복구 지원을 위해 일부 현금 지원을 포함한 5000만 달러의 공여를 약속한 바 있다. 차제에 인프라 시설이나 현물 지원을 새로운 항로 개척에 효과적으로 연계한다면 대양항해 시대에도 조선 강국 한국이 앞장설 수 있을 것이다.

양승윤 한국외대 외국학연구센터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