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7)제72화 비규격의 떠돌이 인생(35)|<필자=제자>김소운|「암파서점」을 찾아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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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그날 나는 동경 신전「스루가다이시따」「산세이도오」서점을 건너다보는 전차 길 이쪽에 서 있었다. 피곤한 몸과 마음-, 부도 귀도 바라지 않으나 구전민요의 정리에 좀더 시간을 쓸 수 있었으면-, 3단7백「폐이지」의 가사 하나 하나가 모두 내 향토의 시심의 결정이요, 생활정서의 기록이다. 면간 습속이니, 생활방식의 변천이니, 그런 문제는 다 제쳐 두고라도 우선 방언연구 하나로도 구전민요는 다시없는 보고이다. 구전 민요집을 제일서방에서 낼 때「방언색인」을 붙이기로 했으나 자그마치 그 색인만으로도 3, 4백「페이지」가 넘는 계산이라 부득이「관사채인」만으로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남아일생의 대사업은 못되더라도 하다 못해 이 하나만은 내 손으로 이루어 놓고 싶다-그러나 우선 목전이 다급하다. 양권 분립의 원칙에는 벗어난 노릇이지만 그 일역원고를 출판사에 넘겨서 돈을 만들어야 한다.
겨드랑이에 낀 보자기 속에는 명치서원이란 출판사에서 퇴짜 맞은 일역 민요집의 원고가 들어있다. 이름도 배경도 없는 알몸뚱이로 남의 나라에서 책 하나 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된 일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두 달치 하숙비가 밀린 터에 이 원고를 그냥 들고 돌아갈 계제가 못된다.
전차길 붉은 신호등을 쳐다보면서 삼성당 건너편에 발을 멈추고 있던 내 머리에 그때 문득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일본서 제일 으뜸가는 권위있는 출판사가 어디냐? 「이와나미」서점-, 그렇다. 거기 이 원고를 가져가 보자. 거기서도 퇴짜를 맞거든 두 번 다시 이 나라에서 책을 낼 생각은 안 하리라-.
「포킷」속에 남은 푼돈을 헤아렸더니 대삼까지 돌아갈 성선 전차비 13전을 제하고 5전이 남는 계산이다. 서점에서 암파서점의 전화번호를 알아서, 공중전화「복스」에 들어갔다.
전화에 나온 암파서점의 교환수에게 나는 사장이니 점주니 하는 말을 쓰지 않고「암파무웅」(이와나미 시게오)씨라고 바로 이름을 댔다. 「무웅」이란 이름이 어쩐지 내게는 젊은 청년 같은 느낌이었다.
『내가 암파무웅올시다.』
굵직하고 억센 목소리가 저쪽에서 들려온다. 암파서점의 사장을, 아버지의 대를 이은 청년으로 알도록 내 인식은 어설펐다.
『무슨 일인가요?』
『원고를 하나 보아 주셨으면 하는데요.』
『지금 당장 입니까?』
『네, 지금 곧.』
『그럼 곧 오시오. 20분 후면 외출을 해야 합니다.』
길을 물어서 찾아갔다.
암파서점은 거기서 5, 6분 거리밖에 되지 앓았다.
부리부리한 눈에 투박하게 생긴 얼굴-, 아무리 보아도 일본서 첫째 가는 출판사의 주인은 아니요, 무슨 토건회사의 현장감독 같은 인상이다. 말이라고는 겨우 두서너 마디 건넸을 뿐, 『나 혼자는 못 정합니다』면서 두고 가라는 원고를 맡기고 실낱같은 일루의 희망을 품은 채 돌아왔다.
하루 사이를 두고 사흘째 되는 날 암파서점에서 속달 엽서가 왔다. 두 번째 만난 암파무웅씨가 무뚝뚝한 어조로『편집부에 돌렸더니, 다들 좋다고 그럽니다. 문고에 넣게 되는데 괜찮아요?』한다.
과거에 장원이나 한 기분으로 나는 언하에 대답했다.
『좋습니다. 그 문고판이 본래의 희망입니다.』
독일 레클람의 본을 떴다는「암파문고」는 최소의 체재이면서 최대의 권위를 자랑하던 일본 문고판의 시조였다. 이듬해 정월, 이래서「조선동요선」이 나오고, 이어서 6월에「조선민요선」이 같은 문고판으로 간행되었다.
암파문고 두 권은 비록 손아귀에 들어가는 작은 책이기는 하나, 그 문고자체의 권위로 해서 학벌도, 졸업장도 없는 내게 일생토록 하나의「호신부」구실을 해주었다. 암파사장 자신도 밖에서 점심이라도 같이 할 때면 무간하게 내 이름에「군」을 붙여서 부르다가도 사에서 나를 대할 때는 깍듯이 저자에 대한 예를 지켰다.
암파서점의 사장실에서 문간까지는 ㄷ자로 계단을 내려 복도를 한참 걸어나와야 한다.
암파씨는 돌아가는 나를 꼭 그 문간까지 전송해 준다. 내 향토의 구전 동·민요를 두어권 일본글로 옮겼기로니 내가 무슨 대단한 저자일까보냐. 덩치 큰 몸집으로「슬리퍼」를 끌면서 내 뒤를 따라오는 암파씨에게『혼자 가겠습니다. 인제 그만 들어가십시오』하면, 암파씨는 표정없는 무뚝뚝한 어조로『당신은 무슨 권리로 남의 사의 사칙을 고치러 듭니까. 저자가 찾아왔을 때 주인인 내가 배웅하는 것은 우리 사의 사칙입니다』하고 익살을 피우면서 기어코 문간까지 내려온다.
서울서 어린놈이 성홍열로 죽었을 때 붓으로 휘갈겨 쓴 눈물겨운 긴 편지로 나를 위로해 준 것도 이 분이다.
패전 직후 이분이 세상을 떠났을 때, 일본은 일개 출판사의 주인을 사회장으로 장사를 지냈다. 북겸창 동경사 경내에 있는 겨우 두어평 되는 조촐하고 고요한 무덤을 그 뒤 14년 일본에 발이 묶여 살면서 나는 가끔 찾아갔다.
비의와 절망에 부딪친 내 약한 마음을 꾸짖고 채찍질해주는 스승-. 암파무웅이란 이름은 출판인과 저자란 인연을 떠나서, 하물며 민족과 거리를 떠나서, 내 인생 길에 등불을 비춰주고 인격의 진정한 의미를 가르쳐 준 대 인생행로의 사표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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