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석학들의 진단 이라크戰 이후의 국제 질서] 헨리 키신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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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과 영국군이 이라크 국토의 대부분을 장악하면서 이라크전이 사실상 끝나가고 있다. 국제사회의 관심은 '이라크전 이후'로 넘어갔다. 이번 전쟁의 의미와 이라크전이 향후 국제질서에 몰고올 파장을 세계적 석학 네명의 목소리를 통해 진단했다.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의 행정부는 이라크전 이후 국제정치가 19세기식 힘의 정치시대로 회귀하는 것을 막고, 동시에 국제기구가 효과적으로 기능하도록 하기 위해 대(對)유럽관계 정상화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미국-유럽관계가 계속 지금과 같을 경우 유럽은 친미국가와 반미국가로 양분될 것이며,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역시 유럽 국가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성격변화가 불가피할 것이다.

또 민주주의의 신념을 확인하는 장치로서의 역할을 해온 유엔은 유일 초강대국 미국에 대항하는 국가들의 성토의 장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반세기 동안 지속돼온 유엔의 전통적인 역할이 끝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라크 전후 문제를 둘러싼 논쟁에는 이 같은 분열의 요소가 있다.

현재 이라크에서 대량살상무기를 찾아내기 위해 혈안이 돼 있는 미국은 이라크전이 완전히 끝난 다음에는 이슬람 국가들에 대한 배타적인 시각을 버려야 한다.

또 전후 이라크 재건사업에 다른 나라들을 참여시키는 것이 결국 미국의 국익에 부합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라크 전후 재건사업의 초기에는 핵심적인 파트너들과만 협력하더라도 단계적으로 협력국가들을 넓혀야 할 것이다. 이때 유엔과 시민단체들에도 중요한 역할을 부여해야 한다.

미국에 맞서 한 목소리를 내자는 프랑스와 독일의 제안은 러시아의 민족주의를 자극했고, 미국에만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는 새로운 기대감을 낳았다.

냉전시대 이후 외교적 영향력을 상실한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독일.프랑스와 연대함으로써 국제사회에서 자국의 확고한 입지를 구축하려 하고 있다. 이런 러시아의 부추김은 미국의 전통적인 동맹국가인 프랑스와 독일을 더욱더 미국에서 멀어지게 했다.

미국은 독일.프랑스와의 외교적 불협화음, 즉 대서양 동맹의 균열을 하루빨리 복원해야 한다. 미 행정부는 군사적 우월성을 과시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미국이 갖고 있는 힘을 국제적 합의로 전환시키는 외교력을 갖춰야 한다. (4월 14일자 워싱턴 포스트)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
정리=박소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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