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진·치의 미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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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그것은 6년에 걸친 피눈물나는 고행이었다.
「간디스」강줄기 이련선하의 숲속에서 석존은 온갖 고통을 육체에 가해가며 순수한 정신만의 존재가 되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고행을 풀었다. 마을로 내려온 그가 처음으로 한 설법은 『이승에서 가장 홀륭한 것은 중도』라는 것이었다.
현대는 욕망의 대해나 다름이 없다. 욕망의 추구를 위한 경제의 고도성장과 물질의 풍족함은 새로운 욕망을 낳고 가중된 욕망의 충족과 좌절은 불만을 가증시키고…이런 욕망의 악순환 가운데서 정신의 황폐며 불가에서 말하는 오온개고가 생기며 사회에 귀열이 일어나게도 되는 것이다.
불타도 욕망을 송두리째 말살하려 하지는 않았다. 그가 고행을 멈춘 것도 인간의 고뇌는 격심한 갈망의 작용에서 생기는 것이니까 욕망 그 자체를 부정하려는 극단적인 고행이며 금욕생활을 할 필요가 없다고 깨달은 때문이었다. 그는 그저 욕망에 눈이 어두어지고 여기 사로잡히는 것을 삼가라고 일렀을 뿐이다.
『절도는 감로의 길, 방일은 죽음의 길』이라고 아함경에도 적혀 있다.
그러나 석존의 중도론은 단순한 중용과는 다르다.
사람을 괴롭히는 번뇌는 모두『내가 좋아하는 대상을 향하여 이를 탐욕스레 갈구하는』 탐과, 『자기 마음에 거역하는 것에 대하여 노하고 원망하는』진과, 『이비를 분간하지 못하게 되는』 치암의 삼독에서 생긴다.
그러나 사람이 살아있는 한 욕망은 없어지지 않으며 욕망에 따르는 번뇌에도 끝이 없다. 이와 함께 부처의 염원도 무진하다. 만약에 번뇌에 끝이 있으면 부처의 자비도 유한일 수밖에 없다.
이처럼 끝이 없는 번뇌인 줄 알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뇌에 매듭을 지으려는 알뜰한 마음씨가 인간생을 더욱 풍요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이다불대라고 보등록에서도 가르치고 있다.
번뇌의 쓴 맛도 참다보면 연시처럼 감미로 바뀌어진다.
따라서 번뇌를 없애는 게 아니라 그것이 지나치지 않게 조정하고, 조화를 잡아주는 게 중요하다 하겠다.
심수만경전
전처실능유
수류인득성
무희역무우
이와 같은 게의 선시속의 「흐름」이란 바로 번뇌를 말한다. 번뇌의 흐름에 거슬리지 않고 그냥 흘러가면 되는 것이다. 기쁘다고 너무 기뻐하고 슬프다고 너무 슬퍼만 한다면 그것들이 응어리져서 흉악한 집념이 되고 쓰라린 미련이 남고 원한이 자라기 마련이다.
석존이『인생은 고』라고 말했을 때 생의 모든 것이 고라는 뜻에서는 아니었다. 고락의 어느 한 쪽에 치우쳐서『인생은 고』라고 여기는 것이 바로『고』라고 말했을 뿐이다. 선존의 중도론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길거리에 버려진 쓰레기 더미속에서도 향기 그윽하고 마음 깨끗한 백련은 피어나오리.』
법구경에 있는 구절이다. 아무리 백련이 깨끗하다 해도 오니없이는 피어나지 못한다. 모든 것이 다 그렇다.
생과 사, 승과 패, 나와 남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공일의 관계에 있다.
따라서 죽음을 무시하고 삶에만 집착한다는 것은 바로 삶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결과가 될 뿐이다.
나만을 생각하고 남을 무시한다는 것은 결국은 나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정녕 제법무아인 것이다. 이승에 있는 것은 모두 혼자 고립되어 있는 게 아니다. 모두가 서로 얽혀서 서로 의존되고 있는 것이다. 옳은 게 아니다. 내가 옳으면 남도 옳을 수 있는 것이다.
석존의 마지막 설법은 『의뢰심을 버리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번뇌의 심연속에서 헤어나지를 못한다. 그것은 바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순수한 인간성의 탓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는 득도나 구제를 우리 밖에서 찾을 필요는 없다. 오직 우리의 마음속에서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게 바로 무사시귀인이라는 선어의 경지다.
도시 『성불』이란 『인간이 인간다와지는 것』을 말하며, 그것은 인간이 자기속의 존엄한 인간성을 찾아내는 것이나 같다.
역사의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에서 맞는 석존의 날에 더욱 절실하게 석가의 말들이 마음에 사무쳐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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