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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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신문이란 말을 담는 그릇인 셈이다. 새로이 듣는 다른 이름이다. 그 집을 언론기관이라느니, 소리를 목탁 또는 경종이라 부름이 그러하다.
경세의 종-. 이것은 미국의 신문왕이라는「허트」의『신문은 되도록 소음을 조성하라』는 이를테면 상업주의와는 상반된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고해서 언중거육산하는 동양적 숭묵주의 또한 신문의 생태가 될 수 없음은 자명하다.
미국풍의 수다나 유가풍의 점잔 빼기가 다 같이 신문의 정풍일수 없는 곳에 경세의 종인 신문이 자리함이라 보여진다.
자발의 경종 소리여야 신문이다. 말하자면 각자 스스로의 경종 소리여야 그 신문의 개성이 인정된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이 신문이나 저 신문들이 모두 비슷비슷하여 여러 가지 신문을 따로 읽을 맛이 없다고들 한다.
이 말은 신문의 개성상실을 의미한다. 곧 자기 소리가 없다는 뜻이 된다. 잡음이나 소름이 아닌 제 소리인 정음이 없다는 뜻도 된다.
위대한 교향악이란 개개악기의 정음 화합에서만 성취될 수 있다.
그 현실 그 시대가 위대한 집결력을 요구할 때일수록 신문 개개의 정음발성으로 대하 합류의 화성을 이룩해야할 것이다.
신문이 많다는 것이 곧 정음량과 정비례하지 못할진댄 수치 그 자체는 사회적 가치와 동의어가 될순 없다. 오히려 물량과 인력의 사회적 불경제 소모를 의미 할 수 밖에 없다.
더구나 정론이 아니고서야 신문의 역사적 증언성이 성립되지 못한다.
이 신문 저 신문이 서로 비슷하여 읽을 맛이 없다는 이야기들이 옳은 이야기라면, 신문의 정론만이 나와 남이 아닌 하나-운명 공동체, 민주 공화체로서의 일체의식을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하나라야만 생리적인 민족 일체감을 만들 수 있다. 나라가 직면한 벽을 뚫기에 그 보다 더 뿌리 깊은 힘이란 있을 수 없다.
『우리 신문은 정론지로서가 아닌 향토지로서의 두시를 결의했다』는 어느 지방지의 말은 다른 경우에 있어 상업지로서의 두시를 의미하게 된다.
그런 향토지나 그런 상업지의 범람은 공해의 우려마저 내포하고 있다. 본의야 어떤것인지간에 정론화음의 저해·마비·오해를 초래하겠기 마련인 까닭이다.
한갓 향토지나 상업지로서 바름 소리 없음이란 사지 오신은 있으되 머리없음과 뭣이 다른가.
곧고 우람한 제세 정논의 백화 쟁취로운 대교잡화음이 아쉽다. 그것은 민족의 정혼을 일깨우는 힘이겠기 까닭이다. <시인>▲일본대예술과 졸업▲경남일보주필겸사장▲삼의원▲시화·서예전 2백회▲시집「개폐교」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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