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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의 피케티식 해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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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훈범
이훈범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전문용어와 그래픽, 통계로 가득한 700쪽 가까운 책이 아마존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다.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 교수의 『21세기 자본론』 얘기다. 우리말 번역서는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곧 이 땅에도 열풍이 옮겨 불 게 분명하다. 결코 쉽지 않은 정치철학서 『정의란 무엇인가』가 100만 권 넘게 팔리는 저력(?)의 나라 아닌가.

 ‘자본주의는 스스로 파괴한다’는 마르크스의 19세기 『자본론』 냄새가 폴폴 나는 책이 자본주의 본산 미국에서 돌풍인 이유는 뭘까. 아마도 신자유주의의 주무기인 낙수(trickle-down) 효과를 반박하고 부의 양극화가 커져갈 뿐이란 주장 때문 아닐까 싶다. 200년 넘는 통계자료 분석으로 뒷받침되는 주장이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이 ‘왜 내가 먼저 못했을까’ 이마를 칠 정도다. 그러니 한쪽 구석에서부터 무너져 내리고 있는 현실을 피부로 느끼는 미국 중산층들이 불안한 시선으로 책장을 넘기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의 돌풍을 의심치 않는 이유가 그래서다. 삼성이 세계 1위 스마트폰으로 최대 수익 기록행진을 벌일 때도 팍팍해지기만 하는 내 살림에 스스로 ‘신빈민층’으로 느끼는 우리네 중산층 아닌가 말이다.

 피케티 주장을 요약하면 부의 양극화는 ‘일해서 돈을 버는 것보다 돈이 돈을 버는 게 훨씬 크기 때문’이다. 그렇게 벌어들인 부는 세습되고, 소득 불평등은 갈수록 단단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 ‘세습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건강한 민주주의를 해치고 만다.

 가장 면역력이 떨어지는 시기가 바로 세월호 사건 같은 게 터질 때다. 오로지 돈만을 위해 정의와 책임 등 민주적 가치가 너무도 하찮게 짓밟히는 데 충격 받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그 악취 나는 먹이 사슬에 주렁주렁 매달린 관료·이익집단을 보며 분노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역시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조셉 스티글리츠는 “불평등이 경제력만이 아닌 정치와 정책의 결과”라는 피케티 말을 중요 대목으로 꼽는다. 사회 일각에서 대통령 하야 주장까지 나오는 이유의 설명이 될 수도 있겠다. 어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지적대로 불평등의 원인이 부자에게 유리한 세금제도인 것처럼 세월호 참사가 결국 부실한 국가 운영 탓이니 말이다. 세월호에 놀란 국민적 상처의 치유가 그만큼 어렵다. 규제 완화와 경제민주화 사이에서 솔로몬의 선택을 해야 할 지금은 더욱 그렇다.

이훈범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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