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서원」은 강학 위주 서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일본의 한 교수는 사적 170호로 보호되고 있는 안동 도산서원의 성립 경위를 규명함으로써 우리 나라의 서원 특히 도산서원의 성격을 밝히는 작업에 나섰다.
이조 유학의 「메카」인 도산서원을 연구하는 일본 무장야대학 「와다나베」 교수는 최근에 간행된 「퇴계 학보」4집(퇴계 연구원 발행)에 『역악서재 재재론―도산서원의 교육적 기능 추구』란 글을 기고, 이 서원 초기의 몇 채 건물에 대하여 세워진 연대와 쓰임새 등을 밝혔다.
이퇴계가 생전에 기거하던 서당(완악재)과 더불어 서당 형태로 시발될 즈음의 건물인 농운정사 및 역악서재는 이제까지 그 건축 시기와 성격은 뚜렷하지 못했던 부분. 그런데 「와다나베」교수의 연구로 도산서원이 학문 연구와 사제 교육을 위해 세워졌다는 그 본연의 모습을 한층 분명케 한 것이다.
현재 도산서원 경내의 위쪽에 위치하는 상덕사·전교당·동서재 등은 퇴계가 작고한지 4년 뒤인 1573년 서원 건립과 동시에 세운 건물들이다. 이에 비해 그 아래에 산재하는 몇 채의 건물은 퇴계가 벼슬을 사양하고 귀향, 학문과 교육에 전심하던 말년에 친히 세운 집들이다.
퇴계 이황(1501∼70)은 1550년 풍기 군수로 있다가 스스로 낙향해 대교육가로 출발했다. 퇴계가 맨 처음 든 집은 내(낙천) 건너 동암에 있던 양진암이며 그후 이웃 하명동과 죽동에 집을 지었고 다시 현 도산서원의 뒷등 너머에 있던 한사암으로 옮겼다. 여기서 그는 좌우에 책을 쌓아놓고 분향하며 깊은 사색에 잠겼다.
퇴계 문집에 의하면 그가 지금의 서원 자리로 옮겨 앉은 것은 1561년. 도산의 당사는 1557년에 짓기 시작해 1561년에 완성했다는 것이다.
서당은 퇴계가 학문 연구와 교류를 위해 마련한 서재로 거실과 마루 및 부엌으로 구성된 3간집. 농운정사는 그를 찾아온 선비들이 유숙하며 학문을 논하던 별채이다.
맨 아래에 위치하는 역악서재는 정료가 그의 어린 아들 지헌 정사성을 퇴계에게 맡기면서 지어 준 집. 처음에는 동몽재라 하여 사이를 둔 산록에 있었는데 곧 현 위치로 이전, 개명해 농운정사의 한 지사로 삼았고 그 시기는 도산서당이 완성된 1561년 이후 몇 년 사이라고 「와다나베」교수는 추정했다.
「와다나베」교수는 조선시대 특히 후기의 서원들이 대체로 충절을 봉제하는 것만으로 사명을 다했던데 비하여 도산서원은 유독 강학에 목표를 둠으로써 서원 본래의 모습을 가장 잘 구현했었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도산서원의 이러한 기풍은 영남지역 몇몇 서원에도 영향을 끼쳐 교육적 서원의 성격을 유지시켜 왔다는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