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랍 왕정의 종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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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소크라테스」 「플라톤」 「헬레니즘」 「데모크라시」의 나라, 「그리스」에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것은 1967년4월이었다.
그 무렵 「그리스」 정정은 좌우정파의 대립·약체내각·북부로부터의 공산위협·「키프로스」 문제를 둘러싼 「터키」와의 분쟁 등으로 혼란을 겪고 있었다. 포병 대령 「파파도풀로스」는 『공산 위협 속에서 무정부 상태의 조국을 구하겠다』는 공약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켰다. 경제적으로는 『이 지상에서 가장 강력한 통화를 만들겠다』고 그는 호언했었다.
그해 12월 「콘스탄티노스」 2세는 정권 전복을 기도했으나 실패, 왕가 일족과 함께 국외로 망명해 버렸다.
군사정권은 계엄령을 선포, 수천명의 정적들을 체포·감금·숙청했다. 그러나 완벽한 탄압은 있을 수 없었다. 1973년5월 친왕파의 해군 장교들이 「쿠데타」를 기도했다 결국 실패, 왕정은 그래서 폐지되었다. 「파파도폴로스」는 국민투표에 의한 신 헌법을 제정, 임기 8년의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렇다고 모든 일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학생의 「데모」는 더욱 가열해지고 외래의 압력도 가중되었다. 기어이 「파」정권은 자유를 주는 듯 정치범을 석방하고 계엄령도 풀었다.
그러나 이번엔 경제 위기가 닥쳤다. 1973년 한해 동안에 「그리스」의 생활비는 50%가까이 올랐다. 국제수지도 악화일로, 불과 9개월(73년1월∼9월)사이에 1백93%인 8억4천「달러」에 달했다. 대외무역 적자도 20억「달러」나 되었다. 더구나 「파」정권은 미국의 지원도, 지원도 더 바랄 수 없게 되었다.
「파」정권은 다시 계엄을 선포하고 압제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제는 누구도 쉽게 승복하려고 하지 않았다. 1973년 11월 역「쿠데타」가 일어나고 말았다. 국민은 환호했다. 그러나 불행을 불행으로 구제 할 수는 없었다. 「기지키스」군사정권은 정권욕만 강했을 뿐 이상도 이념도 없었다. 「기지키스」는 국내의 눈길을 밖으로 돌리려고 「키프로스」에 불을 질렀다. 정말 위험한 불장난이었다. 「터키」가 일어나고 세계 여론이 「기지키스」정권을 용납하지 않았다.
74년 7월23일, 「그리스」의 군사 「쿠데타」 주역들이 연출한 희극은 막을 내렸다. 7년만에 민정이 수립되고 민주 헌정을 회복, 총선도 이미 끝났다. 다시 「정체」를 결정하는 국민·투표를 실시, 공화제를 회복하게 되었다.
「로마」와 「비잔틴」제국의 지배, 15세기 이후 4백년에 걸친 「터키」의 지배, 1832년 이후 왕정의 난맥, 망명, 전화, 퇴위, 암살, 심지어는 원숭이에게 물려 죽는 등 비운의 왕정이었다. 마지막 왕정의 「콘스탄티노스」2세는 지금 「런던」망명 중이다.
서구에서 전후에 처음으로 군사정권을 맞았던 「그리스」는 이제야 진정한 「그리스」로 돌아갔다. 「엘리니케·데모크라시아」(「그리스」의 국호)! 면목이 여실한 민주국가로 발전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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