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송총 고분의 양식은 한반도 삼국계통-동아시아 고대문화를 생각하는 모임」 상원화교수의 새 해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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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동경=박동순특파원】고송총 벽화고분 발견 1주년을 전후하여 그 다각적인 연구성과가 최근 일본에서 잇따라 공포되고있다.
이 가운데 하나로서 성성대학의 「우에하라·가즈」(상원화·미술사) 고수는 28일 하오 『동「아시아」의 고대문화를 생각하는 모임』이 마련한 『고송총·법륭사-동 아세아의 관점에서』제하의 강연을 통해 미술사적 측면에서의 특이한 「어프로치」로 고송총과 한반도의 긴밀했던 관계를 밝히는 한편 통일·신라가 일본의 백봉문화(서기645∼710), 나아가서는 「일본국」형성에서 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주목할 만한 새 해석을 시도했다. 다음에 그 내용을 간추려 본다.
고송총의 수수께끼를 밝히는 중요한 열쇠의 하나로서 축조연대와 벽화양식에 대한 다각적 분석이 시도돼 왔다. 이에 대해 지금까지 많은 일본학자들은 ①축조연대가 7세기 말 내지 8세기 초 ②벽화양식은 당의 뚜렷한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을 일반적으로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고송총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5∼8세기의 서역을 포함한 한국·중국·일본 등 동「아시아」전역의 관점에서「모양」(양식)의 수용 및 변용에 관한 역사적 계통도와 지리적 부감도를 파악하는 일이다.
특히 미술분야에서 「한국의 시각」에서 연구 없이는 고송총의 양식적 좌표를 설정하기란 불가능하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벽화분석 등을 통해 본 고송총 고분의「양식」은 한반도 삼국계통이며 수 및 초기 당의 부분적 영향도 받고 있다.
이러한 한·중 양식의 혼합이 한반도와 일본의 어느 쪽에서 이루어졌는지를 밝힐 명확한 증거는 아직 없으나 굳이 추리를 한다면 한반도에서 혼합되어 일본에 들어왔을 가능성이 짙다.
따라서 그 축조 연대도 7세기 전반, 좀 더 정확히는 「천수국수장」(622년)을 상한, 법륭사금당벽화(680년)를 하한으로 「어느 시기」라 생각된다.
그 근거를 살펴보면-①7세기 후반 설을 뒷받침하는 것에 『성스러운「라인」』에 관한 주장이 있다. 즉 고송총이 「후지와라」(등원)경의 추축선 상에 천무·지통·문무릉(천황릉)과 함께 자리하고 있으며 이들「천황」의 재위 년대는 7세기말∼8세기초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고송총이 동일선상에 있다고 보기 어려우며 고분구조도 천무·지통릉과는 다르고 오히려 성덕태자 묘(622년 사망)와 닮았다.
특히 고송총의 석곽 입구가 둥그스름하게 다듬어져있다는 특징은 도래인의 중심지였던 「히노꾸마」(회외) 주변의 석무대고분(소아마자의 묘설·626년 사망) 등과 비슷하다.
②벽화여인상이 성당기에 재위한 측천무후 (690∼704)의 손녀 영태공주묘 벽에 그려진 여인상과 닮았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는 속물적·과학적 검토가 결여된 연대론에 불과하다.
자세히 관찰해보면 영태공주묘 여인상의 자세가 상체를 뒤로 젖히고 있는데 비해 고송총 벽화 여인상은 상체를 앞으로 숙인 듯한 자세이며 얼굴 모양도 고송총 여인상은 4각형의 얼굴에 살을 붙인 듯한 것으로 영태공주묘 여인상의 둥그스름한 턱과는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동시에 고송총 여인상의 코·인중·윗입술 등을 그리고 있는 날카로운 호선, 뒤로 다바지어 묶은 머리 등은 당보다는 고구려 벽화와 비슷하다. 이러한 4각형적 덕모양, 얼굴을 그린 날카로운 호선 등은 수-한반도 삼국의 양식이며 둥그스럼한 턱과 탄력적 곡선으로 이루어진 당의 양식은 오히려 법융사벽화 등에서 이를 찾아볼 수가 있다.
③벽화여인의 의상에 나타난 불규칙한 무늬가 수대의 돈황벽화와 닮은데 비해 당대의 모티브가 같은 무늬는 규칙적이어서 법융사 벽화의 무늬와 공통성을 갖고 있다. 이러한 무늬의 특징은 수의 마름모꼴무늬가 공주의 백제고분 벽화와 일본의 천수국수장(한반도 도래인이 만들었음)에도 나타나 있는 것으로 미루어 그 역사·지리적 흐름을 짐작할 수가 있다. 뿐만 아니라 경주 무열왕비 구지의 보상연화문과 비 상부의 비룡이 당의 양식인데 비해 고송총벽화의 연화문이나 비룡도는 수·고구려 양식에 가깝다.
요컨대 이러한 일련의 비교 분석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결론은 고송총벽화가 고구려 또는 당의 양식이라는 획일적·일방적 계통론이 「난센스」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이들 계통론은 고구려벽화가 4세기 중반에서 7세기 중반, 남만주에서 평양 주변에 이르는 오랜 역사와 넓은 지리적 전개를 보이며 당의 벽화는 측천무후 시대에 집중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보다 중요한 것은 한반도 삼국과 수·당의 수교관계, 특히 나·당 군사동맹은 당연히 정책적·문화적 관계와 병행된 것임을 간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국교관계를 이해하면 「천지천황」이후 근 40년간 일·당 교섭이 중단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법륭사벽화 등에 초당양식이 도입된 것은 당→통일신라→일본이라는 경로를 통해 이를 수긍할 수가 있다. 즉 통일신라와 천무·지통조의 밀접한 국교관계는 2차대전 이후의 미·일 관계와 비슷하여 백촌강 싸움에서이긴 신라와 패전국 일본 사이에는 다방면의 교류가 있었고 따라서 ▲수→삼국→「임신의 난」이전의 일본이라는 문화유입의 도식대신 ▲당→통일신라→천무·지통조의 일본이라는 도식이 형성된 것이다.
우리는 지금껏 이러한 통일신라와 천무·지통조의 관계를 거의 무시해왔으나 일본이 자랑하는 고가 『만엽집』의 원류도 사실은 신라의 향가이다.
이렇듯 「고송총·법륭사」를 한(삼국통일신라)·중(수·당)의 시점에서 봤을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고대사의 전개를 명확히 파악할 수가 있다.
즉 백촌강싸움(662년) 이후 멸망한 백제의 관인이 대거 중용된 「천지천황」의 백제계「오오미」(근강) 조는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함에 따라 득세한 일본의 신라계 이주인에 의해 전복되어 신라계 천무·지통조가 들어섰다. 따라서 천지·천무의 불화는 백제·신라 계의 다툼이며 「임신의 난」에서 그러한 불화관계가 폭발, 구 체제가 무너지고 새 체제가 들어선 것이라고 볼 수가 있다. 이러한 구체제의 해체를 계기로 일본은 일종의 「점령기」를 거쳐 이른바 「왜」에서「일본」으로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형성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도 고송총 연구가 특히 한반도에서의 시각을 결여하고 있는 것은 ⓛ명치이후의 「황국사관」의 영향 ②일·중공국교 정상화를 전후한 학자들의 극히 시대주의적이며 중공에 영합하는 자세, 즉 「학문적 이익」이라는 학문적「에고이즘」 ③결여된 과학적 자세에 기인한다. 「실증」이 아니고 「권위」가 말하는 학문의 병폐는 「시대주의적」이고 「교조주의적」측면을 중시한다는 점이며 일본에는 지금도 그러한 체질이 뿌리깊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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