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환의 시대공감] 귀의 시대, 입의 시대, 귀와 입의 공존시대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52호 31면

군부정권하에서 사람들은 입이 있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사람들은 귀로 듣기만 했다. 듣는 것도 가려서 듣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었다.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들었다가 행여 입을 잘못 열면 화를 당하기 십상이었다.

대중매체도 마찬가지였다. 신문도 방송도 권력이 말하는 것을 듣고 그대로 옮겼다. 신문이건 방송이건 서로 이름은 달라도 뉴스 내용은 다 같았다. 그 시대에 신문기자는 필경(筆耕)을 잘하면 되었고 방송기자는 앵무새를 닮는 것으로 족했다. 그 범주를 벗어나려면 해직을 감수해야 했다.

민주화가 이루어진 뒤에 상황은 변했다. 입에 대한 권력의 재갈이 풀리자 모두가 입을 열었다. 한동안 입은 입닫음을 강요받았던 집단이 입닫음을 강요한 집단에 대해 고함을 지르는 도구로 쓰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입닫음을 강요받은 사람들에 대해 입닫음을 강요한 사람들의 입도 열렸다. 요즘은 열린 입들이 집단을 이루어 고함 지르는 떼거리 커뮤니케이션이 난무하고 있다.

떼거리 커뮤니케이션은 독특한 메커니즘을 갖는다. 같은 떼거리에 대해서는 서로 귀를 열어 입을 모으지만 다른 떼거리에 대해서는 귀를 닫는다. 그런 과정을 거쳐 같은 떼거리 성원끼리는 공유의 폭을 넓히고 다른 떼거리와는 배제의 담을 높인다.

입의 시대에는 입이 커야 한다. 입이 커야 큰소리를 낼 수 있다. 사람들은 소리의 크기로 상대를 제압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보고 있듯이 정치커뮤니케이션을 주도하는 청와대 홍보수석도, 설득커뮤니케이션을 전문으로 하는 성직자도 귀는 닫고 입으로 고래고래 아우성친다.

입의 시대에 공론장은 군론(群論)의 격전장이 된다. 서울대 박승관 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군론의 커뮤니케이션 체계에서는 분파적 가치나 이익을 추구하게 되고, 전체 공동체적 관점은 사라진다. 정보 처리방식은 이분법적이고 교조적이게 마련이다. 커뮤니케이션을 하면 할수록 사회성원은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갈라지고 쪼개진다.

군론의 시대에 대중매체는 떼거리 싸움의 첨병이 된다. 떼거리 안에 있는 사람들의 귀에 들어갈 정보를 골라 귀맛에 맞게 각색한다. 신문이나 방송이 귀에 넣어준 정보는 떼거리 입씨름의 탄알이 된다. 그래서 동의어 반복의 아우성이 공론장을 채운다. 떼거리 커뮤니케이션이 판을 치는 상황에서, 그러니까 상대방에 대해 귀를 막고 있는 상황에서, 커뮤니케이션은 만개하지만 소통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언젠가는 귀와 입이 공존하는 시대가 온다. 그 시대에는 저쪽에서 입을 열면 이쪽에서는 귀를 열고, 이쪽에서 입을 열면 저쪽에서 귀를 연다. 대중매체는 이쪽 떼거리와 저쪽 떼거리가 서로 소통하는 마당이 된다. 그런 시대가 되면 비로소 입씨름이 아니라 토론이 이루어진다. 배제의 담이 헐리고 공유의 폭이 넓어진다. 그런 시대가 와야 그 사회는 비로소 품격 있는 선진사회가 된다.

귀와 입이 공존하는 시대는 그럼 누가 여는가? 정치인이 여는가, 아니면 대중매체가 여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미국에서 지적신문(知的新聞)의 시대를 연 뉴욕타임스를 보며 우리나라 언론과 언론인을 흘겨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런 신문을 만든 것은 선구적인 언론인이라기보다는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지적 공중(公衆)이었다. 뉴욕에 그런 중립적 공중이 존재했기 때문에 중립적인 지적신문이 나올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그런 조짐이 나왔다. 수도권의 지자체장 선거가 있을 경우, 어떤 때는 보수 정파가 싹쓸이를 하는가 하면 다른 때는 진보 정파가 휩쓸기도 한다. 죽을 쑤든 밥을 짓든 눈 딱 감고 한 당만을 찍는 사람이 현저하게 줄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떼거리 싸움에 넌더리가 난 수도권 유권자들이 선거를 통해 떼거리 세태를 그렇게 응징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지적 공중의 겹이 두꺼워지고 있다는 징후다. 그건 곧 공중사회(公衆社會)가 열릴 전조이기도 하다.

박승관 교수의 정의를 빌리자면, 공중사회란 귀와 입의 공동 복원과 해방에 의하여 태동하는 성찰적 인간주체, 즉 공중이 주도하는 사회다. 그 사회에서는 귀와 입이 균형과 조화, 그리고 상호순환성을 지향한다. 그 사회는 귀를 열어도 되는 사회일 뿐만 아니라 귀를 열어야 하는 사회이기도 하다. 귀를 열어야 배제의 담을 헐고 공유의 폭을 넓힐 수 있다. 이제 우리는 그 시대를 앞당기기 위해 다투어 떼거리에서 빠져 나와야 한다. 입 열기를 자제하며 귀 열기를 일상화해야 한다.



김민환 고려대 미디어학부 명예교수. 고려대 신방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전남대고려대 교수, 고려대 언론대학원장, 한국언론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소설 『담징』(2013)을 썼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