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착화와 출토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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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토착화」라는 말은 언제부턴가 우리가 흔히 쓰는 말 가운데 하나가 되어오고 있다. 『민주주의의 토착화』『과학의 토착화』『일학의 토착화』『양약의 토착화』『자유의 토착화』『시민의식의 토착화』-이런 식이다. 멀지않아 『토착화의 토착화』까지 나오게되면 아마도 토착화의 한 고비가 넘어가는 것이 아닐는지 모르겠다. 표현은 생물학이지만, 실지 적용되는 대상은 제한 없이 광범하다.
외국의 「꽃」 한 종류를 토착화시킨다는 것과 「자유」의 토착화라는 것은 토착화라는 말만은 같지만, 너무나 심한 거리가 있다. 아뭏든 그만큼 토착화시켜야 할 것이 많은 것이 실정인 모양이다.
그만큼 토착의 사물만을 가지고서는 삶을 꾸려나갈 수 없이 된 모양이다. 그런데 토착화에는 시간이 걸린다. 재빨리 국제적인 경쟁에 뒤지지 않기 위해서 온갖 것이 토착화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토착화에는 시간이 걸린다는 것은 분명한 모순이다.
토착화 비슷한 것이 될까 말까한 무렵이면 새것이 들이닥쳐 먼저 것은 흐지부지 없어지고 이번에는 또 무엇의 토착화를, 이렇게 된다. 「토착화」는 이름만 점잖은 명색이고 실지로 있는 것은 「유행」뿐이다.
이와 대조적인 것으로 「전통」의 발굴이 있다. 표현에 견주어 불러본다면「출토화」라고 해도 되겠다. 이 역시 표현은 광물 적이지만 대상은 어디까지나 넓다. 문자 그대로 땅속에 묻혔던 미술품에서부터 「사상」에 대한 재평가에까지 발굴이라는 표현을 쓴다.
「유형문화재」「무형문화재」하는 분류가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여기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전통이 논의되는 것은 그것이 지금 이 시간에 쓸모가 있어야만 의미가 있다. 그런데 지금 「이 시간」은 불행하게도 시시각각으로 움직인다.
모처럼 출토된 토착의 유형무형의 문화재도 이 시간의 움직임에 따라서 관심 속에 들어 왔다가는 곧 사라진다. 예를 들어, 떠들썩하게 발굴이 보도된 문화재가 그 후에 어떻게 정리되고, 어떤 평가가 내려졌고, 관련된 어떤 문제를 가져다 주었다든가 하는 연속적인 보도를 듣는 일은 아주 드물다. 모처럼 발굴된 것들이 발굴된 차례대로 다시 망각 속에 묻혀 버린다. 여기에도 일종의 유행이 있다. 물론 이것은 표면에서의 현상이기는 하다. 말하자면 저류라고 할만한 곳에서는 역시 무엇인가 쌓이고 뿌리를 내리고, 또 정리되어 갈 것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러한 저류가 대량적인 효용의 수면에 환류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매스·미디어」가 쏟아내는 「토착화」와 「출토화」가 빚어내는 허상에 「시간」이라는 시계추를 그때마다 달아보는 것이,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는 꼭 필요한 양생법이 아닐까.
최인훈<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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