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등감-학계구명 기다리는 무령왕릉 출토품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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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왕릉이 발굴될 당초 벽에 등잔을 올려놓은 구멍을 감실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감실」이란 말은 불가의 용어로 부처님을 모신다는 특수한 기능의 공간을 지칭한다. 경주 석굴암의 천장 밑에 그것이 있고 탑이나 동굴사원에도 있음을 본다.
무령왕릉 현실의 그것은 말하자면 감실형의 등대요 벽등이다. 굳이 이름 붙인다면 등감이다. 고구려 고분 (안성동 대총 등)에 시설된 그와 비슷한 공간을 감실이라고 했던 것은 혹시 부처님을 모시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었는데, 유물이 없었으므로 그저 추측한 따름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등잔이 있고 불 켰던 자국마저 있으므로 조명시설임이 분명해졌다. 고분에서 등잔이 출토된다는 것은 상식이지만 이미 발굴된 어느 고분에서도 볼 수 없던 기발한 「아이디어」이다.
『옛 사람들은 죽어서 재생한다고 믿었다. 영혼이 현실 속에서 조그만 우주를 이루어 산다는 영생사상이다. 백제고분으로서 공주 송산리 6호분의 사신도나 부여 능산리 고분의 천체성신벽화 등도 그러한 사상을 입증한다. 그런데 그 현실 (시체를 안치한 방)에 비록 몇 시간 동안이라도 실제로 불을 밝혀 놓은 정경을 생각해보면 백제인의 기지와 낭만을 실감할 수 있을 것 같다』고 국립박물관 최순우씨는 말한다.
무령왕릉에는 등감 이외에 촛대나 등잔이 따로 없다. 현실 좌우 벽엔 각기 둘씩 설치했고 맞은편 북벽에 하나, 남벽은 연도라서 없다. 이 5개의 등감은 바닥에서 2m 높이에 시설했는데, 온통 연화문전으로 감싸인 벽에 백회로 꽃봉오리 모양(보주형)의 화창을 내고 주연에 주칠을 했다. 화창의 높이는 약 25cm.
등잔인 기름 종지는 백자. 이조 때의 등경걸이가 웃단에 기름종지를 놓고 아랫단에 접시를 받혀 썼음에 비하면 그 초기형태의 붙박이 등이다.
고 건축전문가 신영훈씨는 이 등감을 백제시대 주택에 있어서의 한 조명양식으로 주목한다. 백제시대에는 유등과 초가 병용됐었고, 그 형식도 좌등·촛대·걸어두는 대(괘등)·들고 다니는 등(병촉) 등 여러 가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등감이 더욱 주목되는 것은 우리 나라 재래의 「콜쿠리」와 공통점이 많다는 점이다. 함경도 강원도 산간지역에 아직도 남아있는 「콜쿠리」는 벽을 움쑥 파서 등잔을 넣어두는 시설이다. 북방민족 전래의 이 조명시설 본시 「베치카」와 유사한 벽로를 겸했었는데 우리 나라에선 난방보다 조명위주로 발달한 것으로 보인다.
이 등감 양식이 당시의 민가에 얼마만큼 적용될 수 있었을지 추정조차 어렵지만 궁궐 건물에선 능히 이용됐음직한 등명구이다.
과학적 분석을 한다면 종지에 말라붙은 기름도 밝혀질 수 있겠고 타다 남은 심지까지 있다면 아주 완벽한 자료가 되리라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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