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즈벡 관료에 9억원 제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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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한국과 우즈베키스탄 정부간의 대외경제협력기금(EDCF) 현물차관 사업을 주관한 한국과학기기공업협동조합 홍순직(洪淳稷.60.수배 중)이사장이 사업과 관련해 우즈베키스탄 정부 관료들에게 거액의 로비자금을 제공했다고 검찰에서 진술했음이 3일 확인됐다.

洪씨가 밝힌 로비자금은 9억여원으로, 진술 내용이 사실일 경우 한.우즈베키스탄 정부간의 외교 마찰로 비화할 소지가 있어 파장이 따를 전망이다.

서울지검 외사부(부장검사 安昌浩)는 洪씨가 지난해 10월 검찰 조사에서 "내가 운영하는 과학기자재 판매업체인 오리엔트AV의 자금으로 9억원 가량의 비자금을 조성해 해외 로비자금으로 사용했다"고 진술했다고 3일 밝혔다. 이 같은 내용은 洪씨측이 당시 검찰과 법원에 제출한 변론요지서에도 나와 있다.

洪씨측 변호사도 최근 기자와 만나 "1999년에서 2002년 사이 우즈베키스탄 부총리와 검찰총장, 장관급 인사와 고등교육부 국장급 인사 등이 방한했을 때 체재비 등 편의를 제공했고 일부는 로비자금으로 썼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洪씨는 한.우즈베키스탄 차관 사업 성사 직전인 99년 10월 이슬람 카리모프 우즈베키스탄 대통령이 방한해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을 만나는 데도 상당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洪씨는 이에 앞서 96년 인도네시아와의 경협 차관 사업 과정에서도 상대국 관료들에게 비공식적인 경비를 쓴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가 된 경협 차관 사업은 2000년 6월 한국 정부가 우즈베키스탄 정부에 EDCF 자금으로 3천4백만달러(약 3백84억원) 상당의 교육용 과학기자재를 장기 저리로 지원해준 것으로, 과기조합측이 기자재 납품 책임을 맡았다.

洪씨는 당시 조합 이사장 직위를 이용, 이사회를 통해 오리엔트 AV를 주관사로 선정한 뒤 EDCF를 관리하는 수출입은행에 44개 회원사로부터 납품받은 기자재 가격을 부풀려 신고하는 수법으로 88억원의 부당이득을 챙긴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은 지난해 10월 洪씨를 한 차례 조사한 뒤 일단 돌려보냈으나 배임 혐의가 드러나자 지난 1월 초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한 상태다.

그러나 검찰은 洪씨가 문제의 9억원을 실제로는 국내 정.관계 인사들에게 로비자금으로 쓴 뒤 이를 감추기 위해 용처를 해외로 둘러댔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그동안 洪씨는 현물차관 사업을 따내는 과정 등에서 민주당 P의원과 수출입은행 고위 간부 등에게 금품 로비를 했다는 의혹을 받아왔다. 이와 관련, 검찰 관계자는 "洪씨와 李모(52.사업)씨 등 洪씨의 친인척들의 계좌를 추적해 뭉칫돈이 오간 흔적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李씨는 이에 대해 "9억원은 우즈베키스탄 등 현지 민간 대리인들에게 쓴 것이지 관료들에게 로비자금으로 건넨 것이 아니다" 고 주장했다. 검찰은 洪씨를 붙잡는 대로 비자금 조성 경위와 국내 정.관계 또는 우즈베키스탄 측 인사에 대한 로비 실체 등을 집중 추궁할 방침이다.

한편 국내법은 기업인이 외국 공무원에게 뇌물을 제공했을 경우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 있도록 돼있으나 상대국과의 공조수사가 현실적으로 어려워 사법처리 여부는 불투명하다.

실제로 최순영(崔淳永)전 신동아그룹 회장이 2001년 외화 도피 혐의 재판에서 "나자르바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에게 96년 1천만달러를 줬다"고 진술했으나 검찰은 "증거가 없다"며 수사하지 않았었다.

조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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