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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아줌마를 보는 것 같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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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기선민
중앙SUNDAY 기자

“세라 페일린이 생각난다.”

 윤진숙 해양수산부 장관 임명이 17일 결국 강행됐다. 이미 보기 딱할 정도로 자질 시비에 시달리던 참이다. 얼마 전에도 한 라디오 프로에 출연, “저희(해수부)가 (세종시 아닌) 어느 지역으로 간다고 하면 그건 중앙 부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한 것과 관련해 야유가 쏟아졌다. “중앙 부처가 지방으로 옮긴다고 중앙 부처가 아니라면, 전자정부 서버는 청와대 안에 있어야 한단 얘기냐” “그럼 안동 김씨는 안동에만 살아야 하느냐” 등 네티즌의 비아냥이 줄을 이었다. 세라 페일린 얘기도 그중 하나였다.

 페일린은 2008년 알래스카 주지사 신분으로 미국 공화당 부통령 후보에 출마했던 여성이다. 미인대회 출전 경력과 자녀 교육에 열성적인 중산층 주부라는 비정치적 이미지를 내세워 반짝 뜨는 듯했지만 실체가 드러나면서 이내 무너졌다. 대선 토론회에서 늘어놓은 동문서답은 코미디 프로의 놀림감이 됐다. 그는 “부시 독트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알아듣지 못하고 “부시의 세계관을 말하는 거냐”고 반문했고, “외교 경험이 전무하다”는 지적엔 “알래스카에선 러시아가 보인다”고 답해 실소를 자아냈다. 결국 대통령 후보 매케인에게 여성 러닝 메이트는 스스로 사람 보는 눈이 없음을 자인하는 독이 됐다.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질문과 답변이 서로 안 맞았던 것 같습니다.” ‘머리 속이 하얘진’ 윤 장관의 청문회 해프닝도 개그맨들에게 영감을 선사했다. 한 케이블 채널의 코미디 프로에서 윤 장관은 노량진 수산시장 관리반장에 입후보해 “수산시장에서 거래되는 어류가 뭔지 아느냐”는 질문을 받고 “붕어빵도 거래가 되던가?”라고 반문하는 황당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윤 장관 임명은 청문회 결과를 대통령이 존중하지 않았다는 절차상 문제만 야기한 게 아니다. 한국 사회의 ‘유리천장’ 깨기와 관련해서도 뼈아픈 숙제를 남겼다. 새 정부에서 여성 장관이 2명 지명된 건 고위직 여성을 늘리겠다는 여성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었다. 하지만 윤 장관이 ‘동네북’이 되면서 대통령이 의도한 상징성엔 커다란 금이 갔다. 페일린의 예가 극명하게 보여주듯 유리천장을 깨는 전제조건이 지켜지지 못한 탓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여성 배려 인사의 대전제는 다수의 사람이 수긍할 만한 능력이다.

 윤 장관 입장에서 가장 뼈아플 것 같은 댓글 중 하나는 “동네 아줌마를 보는 것 같았다”는 것이다. 동네 아줌마가 어떻다는 게 아니다. 한 나라의 장관이라면 적어도 우리 같은 ‘동네 아줌마’보다는 ‘저래서 남자도 많은데 발탁됐구나’ 싶은 남다름을 갖춰야 한다는 얘기다. 국민이 인선자에게 기대하는 바도 그런 사람을 가려 뽑는 안목일 것이다. 그렇지 못한 인사라면 유리천장을 오히려 강화시키고 고정관념을 확대 재생산하는, 양성평등의 적(敵)일 뿐이다. 윤진숙 임명 파문의 최대 피해자는 도매금으로 넘어갈 뛰어난 여성들이다.

기선민 중앙SUNDAY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