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 속으로] ‘직장의 신’김혜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5면

주체적인 여성의 아이콘인 김혜수. ‘자발적 비정규직’을 스스로 택한 ‘미스김’ 역을 제대로 소화하고 있다. 애초 의외의 캐스팅이라는 지적도 많았으나 물오른 코믹 연기를 보여준다. [사진 KBS]

이제까지 한국 TV에 이런 캐릭터는 없었다. 국내 첫 ‘자발적 비정규직 사원 미스김’ 얘기다. KBS 월화드라마 ‘직장의 신’에 등장한다. 비정규직 문제를 작정하고 주 소재로 삼았다. 직장 생활의 현실적인 묘사에 웃음코드를 잘 버무렸다. 시청률은 10%를 밑돌지만 취업난·고용불안에 허덕이는 젊은층과 직장인들의 반응이 뜨겁다.

 단, 비판도 만만찮다. 일본 드라마 ‘파견의 품격’을 리메이크했는데 원작의 캐릭터·상황 등을 그대로 가져와 창의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그럼에도 얘기는 살아있다. 아쉽기는 해도 베낀다고 무조건 깎아 내릴 이유는 없다.

 배경은 유수의 식품회사 ‘와이장’. ‘미스김’(김혜수)은 3개월 기한으로 파견 나온 계약직 사원이다. 비정규직이지만 완벽한 프로페셔널이다. 남자 못지 않게 힘 쓰는 일, 각종 기술과 잡무, 육체노동, 단순노동이 그의 전공. 업무를 완벽하게 해내는 만큼 자기 권리도 100% 주장한다. 정규직에게 당당히 맞서는 수퍼갑 계약직이다. 계약서에 없는 야근, 잔무는 NO. 점심, 출퇴근 시간도 엄수한다.

 맘에 없는 회식도 거절이다. “무소속인 제가 불필요한 친목과 아부로 몸 버리고 간 버리고 시간 버리는 자살테러 같은 회식을 행해야 할 이유가 하등 없습니다.” 모두가 가족 아니냐는 말에도 “전 교회가 아니라 회사를 다니는 중”이라고 대꾸한다.

 ‘미스김’이라는 이름도 스스로 택했다. 본명과 사생활은 철저한 비밀이다. 그와 사사건건 맞서는 인물이 엘리트 사원인 ‘장규직(오지호)’이다. 신입사원들에게 “높은 스펙의 산을 넘어, 거센 면접의 강을 건너 꿀과 젖이 흐르는 와이장 동산에 입성한 것을 환영한다”고 하고 "정규직 사원증이 카드값과 대출금과 계급을 지켜줄 것”이라며 자랑스러워 하는 그다.

 드라마는 ‘회사형 인간’ 장규직과 ‘단기 취업형 프리랜서’ 미스김을 대비시킨다. 계약직과 정규직의 엄연한 차별 속에서, “저(미스김)는 된장이 아니라 똥”이라며 자조적인 심경도 내비친다.

 사실 미스김은 800만 비정규직 시대의 초상이다. 시청자 게시판에도 “계약직으로 일한 적 있다. 정규직의 문이 좁아지는 상황에 설움받는 이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통쾌한 드라마가 됐으면 좋겠다”는 글이 속속 올라오고 있다. 나아가 정규직·비정규직간 차별을 뛰어넘는 전복적 힘도 가진다. 일과 회사의 노예보다 내 삶의 주인이 되겠다는 미스김의 태도가 그렇다. 세상은 하찮게 여기는 단순업무에서도 자기만족과 달인의 경지를 보여준다.

 연기생활 내내 타인의 시선에 짓눌리지 않는 캐릭터를 소화해온 김혜수는 이번에도 미스김을 맞춤하게 풀어내고 있다. 촌스러운 헤어스타일, 기계적 말투와 동작, 무표정한 얼굴로 한껏 웃음을 자아내며 코미디 또한 그의 장기임을 보여준다. 관록의 연기로, 비현실적 로망일 수밖에 없는 캐릭터에 생동감을 불어넣고 있다.

 한때 직장인 사이에 ‘주인의식’보다 ‘머슴의식’을 가지라는 말이 돌았다. 열심히 일해봤자 남는 건 없다는 푸념이다. 평생직장 신화가 무너지면서 회사와 개인, 일과 나의 관계를 재정립하려는 움직임도 많다.

 맥락은 좀 다르지만 미스김도 그렇게 묻는다. 회사에 몸바쳐 일하면 행복한가요. 정규직이면 다 인가요. 정규직·비정규직보다 당신이 인생의 주인인 게 더 중요한 것 아닌가요.

양성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