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귀식의 시장 헤집기] 꼼수 경제학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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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7호 29면

쩨쩨한 수단이나 방법. ‘꼼수’의 사전적 의미다. 법령을 어기지는 않지만 떳떳하지 않아 뒤가 켕기는 게 꼼수다. 이 꼼수에 대한 평가는 이중적이다. 무릎을 칠 만한 지략으로 인정받기도 하고, 소인배의 사술로 낙인찍히기도 한다.

꼼수는 얼핏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다. 태생적으로 규제나 제약을 피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정부나 기업도 사람의 일이라 그런 꼼수의 유혹을 뿌리치는 게 쉽지 않다. 미국에서 부채한도 협상이 지지부진할 때에 기발한 아이디어로 주목받은 ‘1조 달러짜리 백금 동전 발행’. 최상급 형식논리를 갖췄지만 꼼수는 꼼수였다. 미국의 기념주화 법률에 따르면 정부는 재무장관이 적절하다고 판단하는 종류와 양의 백금 동전을 주조·발행할 수 있다. 그러니 정부가 동전을 발행해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에 맡기고, 대신 재무부 계좌로 1조 달러를 받으면 부채한도를 늘리지 않아도 돈 문제가 저절로 해결된다는 주장이다. 기념주화나 발행하라는 취지로 허용된 정부의 동전 주조·발행 권한을 부채한도 상향에 반대하는 정치인들을 무력화하는 데 써먹자는 속셈인데,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유명학자까지 가세해 더욱 그럴듯해 보였다.

꼼수가 통하면 득이 크다. 그만한 위험도 따른다. 일종의 ‘고(高)위험고수익’이랄까. 꼼수가 꼼수로 들통나면 본전조차 찾기 힘들다. 얼마 전 영국에서 한 투자은행이 보너스 지급을 최고 세율이 떨어지는 시기로 미뤘다가 욕을 바가지로 먹은 게 본보기다. 어차피 바뀌는 법에 따라 절세 좀 하자는 꼼수였는데 성난 여론에 망신 당하고 체면도 구겼다.

꼼수는 대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수단이 못 된다. 오히려 시간을 질질 끌며 문제를 키울 뿐이다. 부실 저축은행의 처리가 그러했다. 2008년 정부는 부실 저축은행을 대형 저축은행에 대거 인수시켰다. 자발적 인수로 포장됐으나 당국의 반강제 권유에 따른 것이라는 게 정설이다. ‘환부는 제때 도려내야 한다’는 구조조정 원칙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꼼수가 작동하는 사이 부실은 피둥피둥 불어났다. 결국 터질 게 터졌다.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듯 꼼수는 꼼수를 부른다. 저축은행 꼼수의 마지막은 일부 정치인이 주도한 ‘피해자 구제법’ 제정 시도다. 5000만원 넘는 예금은 보호받지 못한다는 예금보장제도의 원칙을 입법부가 스스로 짓부순 법안이었다. 결국 무산됐지만 일부 정치인은 마지막 꼼수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을 거다.

꼼수도 진화하고 변신한다. 백악관이 버린 거액 동전 발행 방안이 일본에서 조명받고 있다. 꼼수에 무슨 저작권이 있겠나. ‘윤전기’란 별명까지 얻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에게는 중앙은행인 일본은행과 별도로 정부화폐를 찍어낼 권한이 있다. 예찬론의 출발점이다. 그 찬미가 환상적이다. 정부화폐는 아무리 발행해도 국가부채와는 무관하다. 상환 부담이나 이자 지급 의무가 없다. 국가부채 1경원을 짊어진 나라에는 치명적 매력이다. 화폐의 대량 발행으로 인플레이션이 일어나고, 엔화가치마저 떨어질 수 있지만 그건 아베 정부가 간절히 원하는 바다. 그렇다고 설마 미국이 버린 꼼수를 일본이 거저 갖다 쓰랴.

어디를 가나 꼼수들이 판치는 세상이다. 꼼수에 맞서는 법? 간명하지만 어렵다. 원칙·신뢰·정도(正道)다. 꼼수꾼들과 확실히 담 쌓고 작별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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