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도시의 변화' 사진전 열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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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폭풍이 휩쓸고 간듯 흉한 몰골이 드러난 텅 빈 수영장에는 온갖 기물이 나뒹군다. 한때 이 곳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을 베를린 시민들은 이제 없다.

독일 사진작가 크리스티안 폰 슈테펠린(40)이 붙인 연작 제목 '베를린? 과거의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이 도시가 보여주는 시대의 징후와 착잡한 심리를 함축한다.

베를린의 길거리와 건물을 찍은 사진들이 증언하는 것은 무엇일까. 서울 통의동 대림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베를린, 도시의 변화'전은 건물 자체가 표상하는 독일사회의 기록이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사람들은 도시 베를린이 동서 이데올로기의 20세기를 극복한 한 상징체로 남을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독일과 프랑스 사진작가 8명이 카메라 렌즈로 들여다본 통일 독일의 수도 베를린은 기이하게도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이 도시가 이념과 맺었던 연결고리는 약해지고, 정치와 감성 사이의 경계에서 작가들은 감성 쪽으로 돌아섰다. 한 시대가 휩쓸어버렸던 개인의 자율성을 사진들이 다시 되살려내고 있다.

독일 작가들이 찍은 베를린은 개인적 정조와 체험 때문인지 서정적이다. 그들이 살고 있는 땅을 바라보는 시선은 느리고 우울한 감상 속에 침잠해 있다. 카이 올라프 헤세(37)가 담은 '베를린의 이미지들'은 과거에 대한 향수와 미래에 대한 불안을 현재 속에 뒤섞어 놓았다.

'붉은 시청사 홀'에서 무대에 영사막으로 보이는 운집한 군중의 모습이 옛 베를린을 추억한다면, 의자들만 덩그러니 놓인 시청 강당은 변하고 있는 현재의 베를린이 공허한 공간이 아닐까 암시하는 시각적 장치 구실을 한다. 공동체 하나가 거대한 벽을 넘어 인류사에 새 장을 열 것이라던 꿈이 깨졌음을 의식한 한숨이 실내를 흐르는 듯하다.

이에 비하면 베를린을 바라보는 프랑스 작가들의 눈은 객관적이고 중립적이다.

그들은 이웃 나라를 여행 중이며, 낯선 풍경들을 찍고 있을 뿐이다. 한 폭의 회화처럼 밝은 색채들로 빛나는 컬러 사진은 지난 몇 년 새 유럽의 도시 중에서 가장 많이 부수고 신축한 베를린의 재건축 현장이 작가들에게 한갓 소재로만 작용할 수 있다는 걸 드러낸다.

초고속으로 변하는 도시에서 분단 국의 비극적 역사를 찾기가 어려웠을까.

미술평론가 김성원씨는 "전후에 태어난 젊은 작가들이 베를린이란 도시가 지닌 구태의연한 정치적 이미지를 던져버리고 다양하고 신선한 시각으로 접근한 점이 이 전시에 대한 선입견을 지워 오히려 새롭고 산뜻했다"고 말했다.

베를린 사진 위에 서울과 평양을 겹쳐놓는다면 어떨까. 여전히 분단 국가로 남아 있는 한국 관람객들에게 '베를린, 도시의 변화'전은 관찰하는 현실과 상상하는 현실이 만나는 제3지대가 되고 있다. 2월 23일까지. 02-720-0667.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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