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권근영의 그림 속 얼굴

끝의 시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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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권근영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다음 생물의 이름은?

 “키는 보통 인간의 허리 정도까지만 큰다. 발등엔 곱슬곱슬한 털이 나 있다. 발바닥 가죽은 매우 튼튼해 신발을 신지 않는다.”

 그렇다. 200만 관객을 훌쩍 넘긴 영화 ‘호빗(hobbit)’의 주인공, 호빗 되시겠다. 영화는 10년 전 개봉한 ‘반지의 제왕’ 3부작의 프리퀄(Prequel·앞 이야기)이다. 60년 전으로 시간을 되돌려 모험의 탄생을 알린다. 원작은 1937년 첫 출간됐다. 원작자는 옥스퍼드대 영문과 교수 존 로널드 로웰 톨킨(1892~1973). 학생들의 답안지를 채점하다가 문득 한구석에 “땅 속 어느 굴에 한 호빗이 살고 있었다”라는 문장을 흘려 썼고, 이걸 2년 뒤 아동 모험 소설로 완성했다.

J.R.R. 톨킨, 세계의 끝, 연필과 색연필.

 남아프리카공화국 태생의 톨킨은 세 살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영국으로 이주했다. 열두 살에 어머니도 잃은 뒤 가톨릭 신부의 손에 자랐다. 옥스퍼드에서 문헌학을 전공한 그의 취미는 엘프어 만들기. 엘프는 북유럽 신화 속 요정이다. 톨킨은 전공을 살려 옛 문헌 속 고대 신화와 언어를 조합해 ‘중간계(middle-earth)’를 창조했다. 이야기의 첫 독자는 자녀였다. 자상한 아버지였던 그는 4남매에게 이야기를 자주 들려줬다. 안온한 굴 속에 쟁여둔 음식을 즐기며 일상을 사랑하는 미물 호빗을 모험의 주인공으로 삼은 ‘호빗’이 대표적이다. 즉 이 중간계의 대서사는 조실부모한 그의 결핍이 만든, 작은 영웅 이야기다. 수퍼맨처럼 고귀한 태생도 아니고, 배트맨처럼 돈이 많지도 않으며, 스파이더맨처럼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지도 않아 다른 등장인물에게 끊임없이 무시당하는 호빗이 세상을 구하는 얘기 말이다.

 톨킨은 엘프, 난쟁이, 오르크, 마법사, 용, 호빗, 그리고 인간 등이 사는 중간계를 단순히 머릿속 상상이 아니라 세밀한 지도와 도안, 고유의 언어로 뒷받침했다. 그런 일면은 이달 초 출간된 『톨킨의 그림들』(씨앗을 뿌리는 사람)에서도 엿볼 수 있다. 모름지기 세계를 창조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하는 법.

책 속 그림 중 ‘세계의 끝’에 유난히 눈길이 간다. 낭떠러지를 향해 유쾌하고도 힘차게 발 딛는 사람의 모습이다. 아득한 심연으로 추락해도 크게 다치지 않는 맷집 센 그의 주인공들처럼, 절벽에서 떨어질지언정 그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모험의 시작인 거다. 꼭 좋은 일만 생기란 법은 없지만 이전과는 분명 달라질 것이며, 돌아오면 얘깃거리가 많이 생길 것이다. 떠나기 싫어하는 호빗에게 모험을 종용하며 마법사 간달프가 말했듯. 올해의 끝이자 내년의 시작이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