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1961년 4월 7일 명동 호텔 옥상서 박정희 옹립하던 날

    1961년 4월 7일 명동 호텔 옥상서 박정희 옹립하던 날

    1961년 9월 15일 강화도에서 해병대 훈련을 참관하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오른쪽). 바로 뒤는 김종필 중정부장. 왼쪽은 의전비서관 조상호 중령. [중앙포토] 박정희와 김종필(

    중앙일보

    2015.03.13 01:28

  • 평균 35세, 육사 8기 주축 … 국회의원만 15명 배출

    평균 35세, 육사 8기 주축 … 국회의원만 15명 배출

    김제민 공수단 대대장 1961년 4월 7일 서울 명동 회합에 참석한 5·16 주체는 박정희 소장과 김종필 예비역 중령을 포함해 총 29명이었다. 초기부터 가담한 멤버들이다.  29

    중앙일보

    2015.03.13 00:58

  • 장면 총리 만나고 온 최경록 육참총장 '김종필 군복 벗겨' 메모

    장면 총리 만나고 온 최경록 육참총장 '김종필 군복 벗겨' 메모

    5·16 거사 석 달 전인 1961년 2월 김종필(JP) 중령은 이른바 ‘16인 하극상 사건’의 주동자로 강제 예편됐다. JP는 “군을 관둘 생각은 없었지만 조흥만(사진) 헌병감(

    중앙일보

    2015.03.11 01:30

  • "헌병 700명 풀어 박정희 결딴내겠다"

    "헌병 700명 풀어 박정희 결딴내겠다"

    1961년 ‘5·16 군사혁명’은 김종필(JP) 전 총리가 군에서 강제 예편돼 민간인 신분일 때 일으켰다. JP는 “60년 4·19 이후 정군(整軍)운동에 앞장섰는데 이른바 ‘1

    중앙일보

    2015.03.09 01:19

  • "1960년 11월 거사 모의" … JP "모임 없었다"

    "1960년 11월 거사 모의" … JP "모임 없었다"

    “1960년 11월 9일 9명의 장교는 박정희 소장 집에 모였다. 신당동에 회합한 혁명동지들은 정군과 구국을 위한 혁명을 다시 확인하고 거사를 위한 동지의 조직에 전력하기로 서로를

    중앙일보

    2015.03.09 00:50

  • 합참의장 용퇴 요구 … 군법회의선 "무죄"

    합참의장 용퇴 요구 … 군법회의선 "무죄"

    최영희“한국군은 젊은 장교들의 선동으로 고위 지휘관들이 불안에 사로잡혀 있다. 유능한 장성에게 압력을 가해 강제로 예편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1960년 9월 21일 미국 국방

    중앙일보

    2015.03.09 00:49

  • "군대가 왜 이 지경" 박정희 술자리 울분 … 숙군의 덫에 걸렸다

    "군대가 왜 이 지경" 박정희 술자리 울분 … 숙군의 덫에 걸렸다

    1951년 말 육군정보학교장 박정희 대령(오른쪽)과 특무대장 김창룡 대령(가운데)이 대구 육본 정보국 앞에 나란히 서 있다. 김 대령 왼쪽은 이승철 중령. [중앙포토]박정희 전 대

    중앙일보

    2015.03.05 01:37

  • 사형 위기서 살아난 박정희

    사형 위기서 살아난 박정희

    JP는 “자신이 박정희를 구명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여럿이지만 실제론 백선엽 장군이 다 했다”고 말한다. 박정희 소령이 남로당 가담 혐의로 체포됐을 때 백선엽 육군 정보국장(대령·

    중앙일보

    2015.03.05 01:18

  • 군대 내 남로당 준동, 반란 … 진압 후 대대적 좌익 소탕

    군대 내 남로당 준동, 반란 … 진압 후 대대적 좌익 소탕

    48년 10월 19일 육군 14연대가 일으킨 여순사건 진압을 위해 출동한 국군토벌대. [중앙포토]1948년 10월 19일 밤 10시 전남 여수에 주둔하던 육군 제14연대에 비상나팔

    중앙일보

    2015.03.05 01:17

  • "휴~ 빨갱이 아니었구먼요"

    "휴~ 빨갱이 아니었구먼요"

    1948년 10월 ‘여순사건’ 진압을 위해 광주 토벌사령부에 내려간 박정희 소령(왼쪽)이 송호성 사령관과 협의를 하고 있다. 박 소령은 서울에 복귀한 뒤 남로당 군사책 혐의로 숙군

    중앙일보

    2015.03.04 01:53

  • '박정희 복직' 건의한 장도영

    '박정희 복직' 건의한 장도영

    국군에 의해 폭파돼 끊어진 한강 인도교. [중앙포토]6·25 남침은 문관 박정희의 평판과 이미지를 바꿨다. 장도영 당시 육군 정보국장의 시각도 그랬다. 장도영 회고록에 따르면 박정

    중앙일보

    2015.03.04 01:41

  • "박정희 권력의지 약해 내가 장도영 체포"

    "박정희 권력의지 약해 내가 장도영 체포"

    1962년 1월 20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서울 태평로 국회별관에 있는 중앙정보부를 처음 공식 시찰하고 있다.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왼쪽)이 지부 사무실과 전화하고 있다.

    중앙일보

    2015.03.03 01:41

  • JP 품에서 쏟아진 11개 '혁명 포고문'

    JP 품에서 쏟아진 11개 '혁명 포고문'

    1961년 5월 16일 새벽 5시30분 KBS 라디오 방송을 통해 나간 군사혁명위원회 발표문은 ‘혁명공약’(사진)과 11개의 ‘포고문’이었다.  “친애하는 애국 동포 여러분! 은인

    중앙일보

    2015.03.03 01:30

  • ‘미소 지을 뿐 대답하지 않는다’ JP 정치 결산하는 상징 어휘

    ‘미소 지을 뿐 대답하지 않는다’ JP 정치 결산하는 상징 어휘

    청구동(신당동)은 김종필(JP)의 정치 공간이었다. 지금도 1층 거실은 그가 하루를 여는 곳이다. JP는 TV를 켠다. 그 위에 편액(사진·130X50㎝)이 걸려 있다. ‘笑而不答

    중앙일보

    2015.03.03 01:28

  • 박정희 좌익 의혹 씻기 위해 … 5·16 반공 국시, 내가 넣었다

    박정희 좌익 의혹 씻기 위해 … 5·16 반공 국시, 내가 넣었다

    혁명의 풍운, 권력의 영욕을 거쳐 구순(九旬)을 맞은 김종필 전 국무총리. 그가 자신이 겪은 현대사의 장면들을 증언하고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5·16 혁명공약의 제1항

    중앙일보

    2015.03.02 01:34

  • "헛되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것만 알아주면 돼"

    "헛되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것만 알아주면 돼"

    김종필 전 총리가 직접 쓴 자신의 묘비명.지난달 25일 부인의 장례를 치른 김종필 전 국무총리. 그는 서울 신당동 자택 1층에 마련한 고인의 빈소에서 매일 아침과 저녁 상식(上食·

    중앙일보

    2015.03.02 0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