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한 문학 성찰 돋보이는 '향기로운…'

중앙일보

입력

"문학이 독백으로 간다면 독자로부터의 소외는 필연이다. 나는 서사의 길을 닦아 세상 속으로 가고 싶다. 파죽지세의 반문화적 변화 속에 있는 새천년 초입에서, 솔직히 말하자면 문학 그리고 나, 심청이 같다. 인당수 깊은 물에 뛰어들어야 할 운명을 지닌…"

이런 비장한 각오로 최근 박범신(54.사진)씨가 펴낸 소설집 '향기로운 우물 이야기' 가 문단과 독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문단에 나온 박씨는 '죽음보다 깊은 잠' 을 시작으로 20여권의 장편소설을 숨가쁘게 발표하며 80년대 최고의 인기작가로 떠올랐다.

그런 박씨가 "비록 소수일지라도 진정 문학을 사랑하는 독자들에게 내놓은 작품" 이 이 책.

8편의 단편을 싣고 있는 이 소설집은 우선 다양한 소재의 이야기와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하는 다양한 기법이 돋보인다.

문학평론가 최원식씨는 이 소설집을 "현재와 과거를 마주 세우고 농촌과 도시를 아우르며 정통 사실주의에서 마술적 리얼리즘에 이르는 다양한 기법을 실험하면서 날카로운 전환기를 맞이한 우리의 삶을 해부하고 있다" 고 평했다.

무엇보다 문학의 본질, 삶의 본질을 위해 몸 바치는 소설가적 자세가 믿음직스럽다.

단편 '세상의 바깥' 에는 이런 순교자적 자세가 재미있는 이야기 흐름 속에 그대로 드러난다.

고아 출신의 20세 여사환 박미숙. 잔심부름 다하면서도 못배우고 못생겨 온갖 구박을 받던 그녀는 중년 상사를 짝사랑하다 투신자살하고 만다.

그러나 그녀의 혼은 교통사고로 죽은, 27세의 늘씬한 미녀에 잘나가는 카피라이터 정혜림으로 되살아난다. 정혜림은 직장상사 애인을 여럿 두고 즐기고 있던 여자다.

혼은 박미숙이요, 몸은 정혜림이라는 환상적 이야기를 통해 사랑이란 본질은 없고 향락이라는 껍데기뿐이 세태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면서 그 여자는 결국 자신의 혼, 세상의 본질을 찾아 다시 유년의 추억이 서린 강으로 투신한다.

"햇빛이 반사되어 내는 광채가 아니라 강이 자신의 깊고 옹골진 그리움으로, 슬픔으로, 그 빛나는 황금비늘들을 빚어올리는 것" 이라며 강의 중심, 인간의 중심으로 몸을 던진 것이다.

그녀는 바로 문학의 성전에 몸을 바치겠다는 박씨의 각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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