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 칼럼] 대기업은 배드 가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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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2면

박인구
한국식품산업협회장·동원그룹 부회장

세계가 하나의 시장인 시대다. 우리는 가격과 품질 경쟁력에서 세계 일등이 되지 않으면 도태되고 마는 세상에 살고 있다. 과거에는 한 나라 안에서라도 경쟁력이 있으면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완전경쟁시장이 돼 가는 오늘날에는 ‘물리적 거리’란 것이 별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됐다. 오죽하면 TV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일등만 기억하는 이 더러운 세상”이라고 했을까. 그런 뒤편에서 양극화는 세계적인 공통 이슈가 됐다. 산업구조의 고도화와 자동화가 실업자를 양산하는 게 현실이다.

 경제 개발 초기부터 대기업 중심으로 발전을 추구했던 우리나라는 성장 과정에서 대기업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게 됐다. 이뿐만 아니라 양극화가 진전돼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상대적 격차도 더욱더 벌어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런 대기업 위주의 폐해를 지적하기도 하지만 우리나라 여건에서 불가피하게 생성되고 발전된 체제를 그런 잣대 하나로만 볼 수는 없다. 그래서는 무엇보다 우리의 압축성장을 설명할 수 없다. 오히려 자원을 특정 분야에 집중하고, 의사 결정을 빨리 하는 오너 경영의 장점으로 인해 이렇게 발전해 왔다는 평가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그 결과로 양극화가 나타난 것은 인정해야 할 부분이다. 이를 치유하기 위해 우리는 중기 육성을 외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다양한 중기 육성시책에도 불구하고 갈수록 양극화가 심해진다는 사실이다.

 현실을 들여다보면 훌륭한 중기도 있고, 어려운 대기업도 있다. 그럼에도 매출 규모나 종업원 수 같은 일률적 잣대로 기업을 구분해 중기는 지원해야 하고, 대기업은 ‘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매도하는 게 타당한 것일까. 최근에는 대통령까지 나서 대기업과 중기 사이에 있는 중견기업에 대한 대책도 마련하도록 지시하신 바 있는데, 왜 우리는 크기만을 기준으로 지원대책을 세워야 하는 것일까.

 중요한 건 기업의 크기가 아니다. 손톱깎이를 만드는 중기라도 분야별로 세계 1위 기업을 육성하는 것이 급선무다. 기술이 급변하는 오늘날은 한 분야에서 영원히 일등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미래의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사업을 다각화하려 하는 것은 대기업이나 중기나 마찬가지다. 다만 다각화를 하더라도 투자 규모가 크거나 글로벌기업과 싸워야 하는 분야는 대기업이 맡고, 내수는 그 분야만 전문으로 하는 대기업이나 중기가 맡도록 하는 게 순리일 것이다.

 세계 1위 식품기업 네슬레는 본사가 있는 스위스에서의 매출이 전체의 2~3%밖에 안 된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세계적인 전문기업이 나오기 위해서는 중기 적합업종이니 뭐니 해서 규제하는 것보다는 대기업이든 중기든 전문기업이면 그 방면에서 세계적인 기업으로 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바람직할 것이다. 한편으로 대기업들은 사업을 다각화하더라도 글로벌 경쟁과 관계없거나 그룹의 전문성과 동떨어진 내수 중심의 업종에 무작정 진출하는 것은 스스로 자제해야 할 것이다.

 영세한 소기업을 돕는 일은 물론 필요하다. 그러나 대기업의 확장을 막는다며 시장 원리에 어긋나는 제도를 만드는 것보다는 전문기업을 육성하는 데 힘을 기울여야 한다. 선거철을 앞두고 정치인들이 표를 얻기 위해 단순한 이분법으로 중기는 ‘굿 가이(good guy)’, 대기업은 ‘배드 가이(bad guy)’로 몰아붙이는 것은 더더욱 경계할 일이다.

박인구 한국식품산업협회장·동원그룹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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