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환투기로 물러난 스위스은행 총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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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힐레브란트 스위스 중앙은행 총재가 9일(현지시간) 베른에서 열린 기자회견을 통해 사임을 발표하고 있다. 그는 부인 카샤의 내부자 거래 의혹으로 사임 압력을 받았다. [베른 AP=연합뉴스]

전 스위스 중앙은행 총재의 부인인 카샤 힐레브란트는 지난해 8월 15일 미국 달러화를 사들였다. 50만4000달러(약 5억8000만원)였다. 오랜만에 해보는 외환게임이었다. 그는 전직 헤지펀드 트레이더였다. 카샤는 회사 동료이자 남편인 필립 힐레브란트(49)가 2003년 스위스 중앙은행 이사가 되자 ‘머니게임’을 그만뒀다. 그러곤 스위스에서 예술품 갤러리를 열었다. “카샤는 스위스프랑화와 견줘 아주 싼값에 미 달러화를 사들이면서 아직 녹슬지 않은 트레이더 본능에 스스로 감탄했을 것”이라고 영국 가디언지는 9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당시 카샤는 그날 달러 매입이 남편의 앞길을 막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지난해 12월 스위스 중앙은행 조사에서 “남편인 필립이 통화정책 정보를 주지 않아도 내가 시장을 읽고 그 정도는 매매할 수 있다”는 요지로 진술했다.

 카샤의 주장은 스위스 정치판에선 통하지 않았다. 야당인 우파세력이 들고 일어났다. 중앙은행이 조사해 면죄부를 줬으나 야당의 반발은 가라앉지 않았다. 야당은 평소 필립 퇴진을 요구했다. 통화가치를 훼손하고 금융규제를 강화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결국 필립은 이날 스위스 중앙은행 총재 자리에서 물러났다. 스위스 역사상 가장 젊은 나이에 중앙은행 총재가 된 지 2년 만이다. 그는 퇴임을 알리는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된 게 너무나 아쉽다. 총재직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 사자처럼 싸웠다”고 말했다. 필립의 사퇴 이유는 내부자거래 혐의다. 타이밍을 보면 그는 의심받을 만하다. 아내가 달러를 산 지 이틀 뒤에 중앙은행 총재인 필립은 외환시장에 뛰어들어 스위스프랑화를 팔고 달러와 유로화를 사들였다. 아내가 보유한 통화가치를 인위적으로 끌어올려 준 셈이다. 20여 일 뒤인 9월 6일 필립은 한술 더 떴다. 근대 중앙은행 역사상 보기 드문 환율목표제(Exchange Targeting)를 채택했다. 그는 “스위스프랑의 가치가 유로당 1.2스위스프랑 이상으로 오르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스위스프랑을 시장에 쏟아부었다. 그리고 한 달쯤 흐른 뒤인 10월 4일 카샤는 달러를 팔아치웠다. 달러 가치가 17% 정도 뛴 뒤였다. 환차익은 7만5000스위스프랑(약 9000만원)이었다. 필립과 카샤는 ‘헤지펀드 커플’이었다. 1990년대 미국 헤지펀드인 무어캐피털매니지먼트에서 함께 일하다 결혼했다. 무어는 환율·금리·성장률 등 거시 변수를 이용해 돈을 버는 곳이다. 필립은 펀드매니저였고 카샤는 트레이더였다. 필립이 투자전략을 짜면 카샤는 그 전략에 따라 시장에서 해당 자산을 사고팔았다. 그러면서 필립은 거시경제 분석 노하우를 익혔다. 이는 스위스 중앙은행 입성의 발판이 됐다. 반면 카샤는 가격 흐름을 읽을 줄 아는 안목을 다듬었다. 두 부부의 성공과 추락의 씨앗이 그때 뿌려진 셈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날 “또 한 명의 금융 거물이 내부자거래 덫에 걸려 쓰러졌다”고 평했다.

세계적인 컨설팅업체인 맥킨지의 전 회장인 라자트 굽타와 세계적인 헤지펀드 갤리언 회장인 라지 라자라탐, ‘투자의 귀재’인 워런 버핏 후계자 후보였던 데이비드 소콜 전 미드아메리칸에너지홀딩스 회장 등이 내부자거래 때문에 감옥에 가거나 추락했다.

미 금융역사가인 존 고든은 “경제 리더들이 거품시대 느슨한 윤리의식에 젖은 탓”이라고 말했다.

강남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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