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정조 19년, 잃어버린 시간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4면

왕위에 오른 지 19년째인 1795년은 정조에게 가장 힘들고도 중요한 해였다. 여전히 '대통합의 정치'는 이뤄지지 않았다. 백성들의 생활이 특별히 좋아진 것도 아니었다.

정조를 더욱 곤혹스럽게 한 것은 측근들의 비리 연루 혐의였다. 1795년 사관 정동준의 '공사비 횡령 혐의'가 그것이다. 당시 정동준은 국왕의 지시로 채제공을 도와 정조 재위의 최대 프로젝트인 화성 건설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말끝마다 천위(天威)를 희롱하고 사사건건 조정의 명령을 가차(假借)"했으며, 공사에 드는 "경상비를 축냈다"는 탄핵을 받은 것이다.

정조는 의외로 이 탄핵을 전폭 수용하고, 스스로 "반성한다"는 비답을 내렸다. 정동준에 대해서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임금의 위세와 권력을 농단한 죄"로 자결케 했다. 아마도 '공사비 횡령'은 사실이 아니었지만, 화성 건설의 이미지를 훼손한 죄로 처벌받은 듯하다.

탄핵이라도 되는 곳은 그래도 괜찮았다. 절망적인 것은 바로 관료제의 무서운 타성이었다. "요사이 풍습은 '불언(不言)'이라는 두 글자를 마음속에 장착해 놓고서, 모나지 않게 그럭저럭 넘어가는 것(無模稜)을 능사로 삼는 것"이라는 지적처럼, 관료들은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으려 했다.

이러다 보니 착수만 해놓고 중단된 국책사업이 많았다. 그 대표적인 것이 1년 전에 시작된 화성 건설이었다. 수원 화성의 건설은 애초에 국가 재정을 확충하고 수도방위체제를 재정비한다는 목적으로 시작됐다. 그런데 화성 성역이 진행되면서 '천도(遷都) 의혹'이 불거졌다. 국왕의 관심이 집중되면서 신도시 규모가 원래 계획보다 커졌기 때문이다.

기득세력의 반발은 다양했다. 흉년을 이유로 공사 정지를 요구하거나, 성역공사를 진시황의 축성에 빗대어 비난하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축성공사 도중 태풍이 불고 '공사비 횡령 혐의'가 불거지자 여론은 급속히 나빠졌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일이란 망치기는 쉬워도 이루기는 어려운 법"이라면서 기회를 놓치지 말자던 정조도 주춤거렸다. 더군다나 7월 이후 노론이 천주교 문제로 남인 쪽 신료들을 공격하면서 어렵사리 조성한 '탕평정국'도 와해돼 버렸다.

"아무리 고심해도 정치가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정조의 개탄은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지금 한번 힘을 쓰면 혹 전광석화와 같은 효과를 기대할 수 있으리라 여겼었는데, 요즘 진행되는 일을 보노라면 나 스스로 크게 부끄러운 생각만 든다"는 말이 그것이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정조는 그해 봄에 중요한 실수를 했다. 그는 국법에 저촉돼 연금상태에 있던 자신의 고모 화완 옹주를 석방했다. 사도세자의 '유일한 동기(同氣)'를 풀어 주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 아마도 그것은 윤 2월 화성 행차의 여파 때문이었을 것이다. 친위부대 장용영의 괄목할 만한 기동력과 주위 신하들의 찬사에 우쭐해진 그가 '어진 선비를 가까이하고 내외척을 멀리한다(右賢左戚)'는 자신의 정치 원칙을 저버린 것이다.

한번 원칙이 무너지자 왕의 발언도 힘을 잃었다. 국법을 어기고 사사롭게 인척을 풀어 줬다는 비판이 쇄도했다. 정조는 금령을 설치해 그 사안을 아예 거론하지 못하게 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하지만 그는 이후 남인까지 합세한 거대한 신료 집단과 힘겨운 줄다리기로 시간과 정력을 허비해야 했다. 작은 실수가 결정적인 실기(失機)로 이어진 것이다.

나는 정조 재위 24년 중 이 시기가 최대의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비단 그 당시 정조에게만 해당되는 건 아닐 것이다. 절망의 끝으로 보이는 그 시점이야말로 잃어버린 초심을 되찾고, 필생의 용기로 전진해야 할 때라는 것을 도도한 역사의 물결이 말해 주고 있지 않은가.

박현모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