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cover story] 팬 그들이 스타를 만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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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달 말 첫 단독 콘서트를 여는 가수 테이. 이번 콘서트의 수익금 전액은 시각 장애인을 위해 쓰일 예정이다. 그의 한 팬이 "테이의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유지하기 위해 콘서트를 어려운 이웃과 함께 하자"는 아이디어가 채택된 것. 가수의 이미지 관리도 팬이 앞장서는 시대. 테이의 표정이 이토록 행복한 건 이런 든든한 후원자 때문이 아닐까.촬영 협조=㈜뮤직시티

지난달 중순 MBC 방송국 정문 앞. 흰색 소복을 입은 한 여성이 'victim을 살려내라'는 내용의 피켓을 들고 서 있다. 이들은 가수 서태지 팬. 'victim'이란 노래가 방송 불가 판정을 받자 이에 항의하는 1인 릴레이 시위를 벌인 것. 한 명이 3시간, 하루 세 명씩 등장한 이들의 시위는 4개월이 넘게 진행됐다.

'victim'과 관련된 이들의 행동은 이뿐이 아니다. 거리 전단지 배포, 지하철 내 게릴라 시위, 플래시 몹 형식의 퍼포먼스 등 무차별적이며 돌발적이다. 뚜렷한 조직체도 없다. 수십 개로 흩어진 서태지 팬클럽이 인터넷상에서 난상토론을 거친 뒤 자신의 처지에 맞는 행동을 개별적으로 벌인다. 구심점이란 단 하나, 서태지란 스타다.

별다른 반향을 끌어내지 못하자 이들은 지난달 21일, 1인 릴레이 시위를 스스로 끝냈다. 이날은 서태지의 생일. 자신들로선 뜻깊은 날 적절한 수준에서 집단 행동을 중단하는 모양새를 갖춘 것이다. 전략 수정과 시의성, 상황 변화에 대한 대처력, 때론 치고 빠지는 기민함까지. 프로 운동가 못지 않음을 물씬 풍기는 대목이다.

이번에 성공하지 못했다고 쉽게 좌절하지도 않는다. 서태지 팬인 신모(24.여.회사원)씨는 "가요계의 뿌리 깊었던 립싱크.저작권 문제 등이 개선되는 데 우리도 한몫 했다고 본다. 우리가 좋아하는 서태지란 스타를 넘어 대중 문화 전체로 우리의 관심은 넓어지고 있다"고 자부한다.

아무 생각 없이 공연장에서 소리를 지르고, 풍선을 흔드는 소녀들로만 팬을 규정한다면 세상 물정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얘기다. 그들은 집단적이며 투철하고, 또한 헌신적이다. '빠순이'로 치부했다간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

이것이 어디 대중문화에만 한정되랴. 2002년을 뜨겁게 달구었던 월드컵 신화도 그 출발점은 축구 국가대표 팬들인 '붉은 악마'에서 비롯됐다. 현재의 대통령을 탄생시킨 그 밑바탕엔 '노사모'란 정치인 노무현의 팬들이 있었다.

팬덤(Fandom : 특정 인물을 열성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 혹은 그러한 문화 현상)은 이렇게 무섭게 변모하고 있다. 인터넷이란 매체에 힘입은 바도 있으며, 거창하게 말하면 한국 민주주의의 성장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다면 당신 역시 팬덤의 한복판에 서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힘, 우리가 팬덤에 주목하는 이유다.

글=최민우.남궁욱 기자<minwoo@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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