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 뛰어넘는 조앤 롤링의 '영화 검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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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문학은 죽고 영화만 살아 남았다"는 시인·소설가의 푸념이 터져나오는 이 시대, 영화 '해리 포터' 시리즈는 이런 불평을 뒤집는 좋은 보기가 될 것 같다. 영화에 대한 원작자 조앤 롤링의 지독한 '검열'을 두고 하는 말이다.

검열? 다른 말을 빌리면 철두철미한 작가정신이 어울릴까. 하여간 영화를 감시하는 작가의 눈은 상상을 초월한다. 다음달 14일 미국·영국 등에서 개봉하는(한국은 12월 13일 예정) '해리 포터' 시리즈 2탄인 '비밀의 방' 홍보자들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다.

조앤 롤링은 아예 마케팅 전반을 통괄하는 가이드북을 만들었다. 번역·홍보·디자인·프로모션 등을 일일이 통제하는 지침서를 각국에 보낸 것. 80여쪽의 분량에 항목별 '지시 사항'을 빼곡히 기재했다.

그가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번역이다. 동일한 영어 단어를 각국 언어에 맞게 달리 번역할 경우 반드시 그 이유를 설명해야 하고, 또 본사(워너 브러더스)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예컨대 원작에 빈번히 등장하는 'Magic'은 한국어 문맥상 마술·마법·신비한 등으로 번역될 수 있으나 본사의 승낙이 떨어진 이후에야 이를 사용할 수 있다.

홍보에 대한 간섭도 엄청나다. 본사에서 작성한 보도자료를 첨삭·윤색 없이 직역해 배포해야 한다. 각국에서 임의로 자료를 만들면 안 된다. 홈페이지도 본사에서 만든 것을 각국 언어로 번역해야 할 뿐, 나라별 변형은 봉쇄됐다.

또 영화와 책의 공동 마케팅을 규제해 흥미롭다. 책과 영화를 함께 홍보하는 이른바 '윈-윈 전략'을 포기했다. 일례로 책을 알리기 위해 영화의 이미지를 사용하는 것조차 금지했다. 코카콜라의 경우 4년간 4천5백만권의 책을 배포하는 것을 전제로 공동 프로모션을 따냈으나 그나마 영화의 로고만 사용하는 조건이다.

이쯤 되면 시어머니도 대단한 시어머니다. 롤링이 이처럼 '감놔라, 배놔라'하는 가장 큰 이유는 원작의 의도가 손상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 영화가 소설 내용을 충실하게 옮겨놓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그의 파워가 워낙 세다 보니 영화사도 울며 겨자먹기로 따를 수밖에 없다.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의 한순호 이사는 "대사의 한줄 한줄을 체크했던 '풀 메탈 자켓'의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나 'AI'의 마케팅에 관여했던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롤링에 비하면 지극히 얌전한 편"이라고 말했다.'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했던가. 그런데 롤링에겐 '소설은 영화보다 강하다'가 적확할 것 같다. 이미지 범람의 시대에 문자향을 고집하는 그의 '괴벽'이 신선하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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