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사 실증적 연구 물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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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와 한국근현대사학회 공동으로 조사 발굴한 베이징(北京)·톈진(天津)·시안(西安)·옌안(延安) 등 중국 서북부 지역 60여 곳의 유적은 두 측면에서 독립운동사 연구에 상당한 기여를 할 것으로 보인다.

우선 문헌에 잘못 기록돼 있던 사적지를 직접 답사를 통해 바른 위치를 확인함으로써 독립운동 단체들의 근거지와 활동반경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게 됐다.

예를 들어 그동안 시안의 두취(杜曲)가 광복군 활동의 중심지였음은 널리 알려져 있으나 이번에 왕취(王曲)군관학교의 존재가 확인됨으로써 광복군의 전신이었던 한국청년전지공작대의 활동내용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됐다.

당시 군관학교 교관으로는 조시원·조경한 등이 활동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왕취 근처에 자리한 태을궁(太乙宮)에 광복군 수십명이 기숙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광복군이 미군 OSS와 합동작전을 벌였던 지역도 처음으로 확인돼 앞으로 광복군의 활동을 좀더 구체적으로 밝힐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둘째로, 조선의용군의 활동 근거지와 회의 장소 등을 중국 내 학자와 후손들의 증언을 통해 발굴함으로써 사회주의 계열이라는 이유로 그동안 연구가 소홀했던 조선의용군의 항일 활동을 밝히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할 것으로 평가된다.

무정 등 조선의용군의 일부 간부들이 주석단의 일원으로 참석했던 '동방 각민족 반파시스트 대표대회'(1941년 10월 26~31일)의 개최 장소가 옌안에 있는 '옌안대예당'이란 사실도 이번에 처음 확인됐다.

최근 독립운동사 학계는 조선 의용군의 항일 활동을 독립운동사의 한 부분으로 포함시키기 위해 문헌과 유적지 발굴에 적극 나서고 있다.

이번에 밝혀진 독립운동가 김기창·김성호(중국명 周文彬)일가의 항일운동 행적도 흥미롭다. 1911년 신민회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김기창은 그동안 사건 이후 행적이 잘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이번에 거주지가 발굴됨으로써 1914년 베이징으로 이주해 독립운동을 계속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그의 둘째 아들인 김성호는 안창호·신채호·김산(본명 장지락) 등과 교류하며 조선의용대에서 활동하다 1944년 36세로 순국해, 현재 스자좡(石家莊)의 화북열사능원에 묻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네이멍구(內蒙古) 중서부 바오터우(包頭)일대 답사를 통해 그간 말로만 전해지던 이 지역 독립운동 기지를 확인한 것도 빼놓기 어려운 성과다.

조병준·신우현 등 평북 의주 출신의 민족지사를 중심으로 네이멍구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것은 1924년께다. 조병준은 특히 농지를 개간하고 그곳에 배달소학교를 세워 의민부(義民部)라는 저항조직을 세워 활동했다.

조사단은 이 과정에서 그의 손자 조동춘(63)씨 가족과 극적으로 상봉하기도 했다.

이번 조사팀장을 맡았던 장석흥(張錫興·국사학)국민대 교수는 "독립운동단체와 인물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유적(지)에 대한 복원사업이 시급하다"며 "현재 설립돼 있는 상하이와 충칭(重慶) 임시정부 기념관 외에도 시안의 광복군·옌안의 조선의용군·베이징의 독립운동기념관 등이 세워져야 중국에서 전개된 독립운동의 실상이 균형있게 복원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정창현 현대사 전문기자

김창호 학술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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