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고문했던 그가 신부로 나타나다니… 사랑으로 원수를 용서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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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악마는 과연 존재하는가'라는 의문은 인류가 생존해온 이래로 끊임없이 지속돼 왔다. 악마의 정의를 괴테식으로 '악을 행하는 힘'이라고 한다면 악마의 존재는 조금 더 명확해진다.

가톨릭신문에 연재됐던 최인호(사진)씨의 『영혼의 새벽』이 흥미로운 것은, 손놓을 겨를도 없이 한순간에 후딱 읽히는 것은 나약한 한 인간이 악마에 맞서 대항하고 끊임없는 고통과 갈등 속에서 마침내 용서하는 모습을 감동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악마는 신화일 뿐이다. 그러므로 악마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합리주의적 단언에 대해 프랑스의 사회학자 루지몽은 '악마는 신화다. 그러므로 악마는 존재하며 끊임없이 행동한다' 라고 응수했다.

생물학자 장 디디에 뱅상도 생명체를 구성하는 요소에는 이미 악마가 개입돼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해 『인간 속의 악마』라는 책을 썼다.

그렇다면 때로 인간의 영혼과 존엄성이 흔들리는 이유는 바로 악마 때문일까.

우리 내면 깊숙한 곳에 숨어 있는 미움이나 복수, 질투나 사악한 감정들, 그 모든 것들도? 그렇다면 내 안의 악마는 어떻게 사라지게 할 수 있겠는가. 새로 이사 간 교구(敎區)의 성당에서 '그'는 한때 자신의 인생을 짓밟았던 고문기술자 S를 만난다.

그가 S를 용서할 수 없는 건 S가 바로 그 성당의 사목위원이기 때문이었다.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S, 즉 사탄(Satan)이라고 했던 고문기술자. 그의 신앙에 대한 고뇌와 고통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책을 따라 읽던 나는 그가 사탄이었던 S를 절대로 용서해서는 안 된다고, 기어이 S를 심판대 위에 올려놔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어느새 나는 용서하지 못한 마음으로 스스로 괴로워하던 내 마음과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곧 베드로의 눈물이 어떤 의미인지 알 것만 같았다. 예수를 세 번 배반한 베드로의 눈은 한평생 눈물로 짓물러져 있었다고 한다. 나는 선량하고 착한 사람은 되고 싶지 않지만 내 안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그것이 불가피하다는 뉘우침 또한.

심판은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이 생의 '죽음의 행진'을 하고 있는 건 용서의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일 것이다. 불가능의 가능. 그것이 용서다. 평화를 얻을 수 있는 건 바로 용서하는 것이라고 최인호씨는 말한다.

마침내 부활절날, 그는 S에게 악수를 청한다. 그는 용서하면서 전율한다. 인간은 원수를 용서할 수 있다고, 인간의 용서는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이미 용서받은 존재이자 사랑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바람은 밖에서 부는 게 아니라 내 안의 격정에서 터져나오는 것이다. 보들레르는 "악마가 지닌 가장 멋진 간교함은 바로 우리들이 자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다"라고 했지만 만약 보들레르가 『영혼의 새벽』을 읽었다면 그는 이렇게 말했을 것 같다. "악마가 지닌 가장 큰 두려움은 인간이 용서할 줄 아는 존재라는 것이다"라고.

최인호씨의 이토록 아픈 구원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용서하는 방법을, 악마와 싸워 이길 수 있는 방법을, 그것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우리 마음의 평화를 보여주고 있다.

조경란<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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