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중계방송의 횡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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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온 나라가 열광하고 전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던 월드컵 축구대회도 국내외의 찬사와 경탄 속에 막을 내렸다. 그런 만큼 월드컵 축구대회에 대한 평가도 찬사로 가득하다. 대회에 다소의 흠집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를 시비한다는 것은 어쩌면 국민정서가 용납하기 어려울 만큼 분위기가 고조돼 있다.

지상파TV들 똑같은 그림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보다 나은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대회를 냉철하게 결산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열광의 환호성 속에 성찰의 기회마저 파묻어버리는 것은 성숙한 모습이 아니다. 가릴 것은 가리고 고칠 것은 반성해야 미래를 약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작업의 하나로 우리는 월드컵 축구대회 기간 중 보여준 우리 방송의 행태를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 방송의 횡포였다. 모든 지상파 TV가 64개 경기 대부분을 중복해 중계하고, 그것도 모자라 재탕 삼탕한 까닭에 6월 한달 동안 시청자들은 프로그램 선택의 자유를 박탈당해야 했다. 이같이 시청자의 권리를 철저히 무시한 편성이 방송의 횡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심지어 국가기간방송이며 공영방송인 KBS마저 한국팀의 16강 진출 이후 우리 팀이 출전한 경기를 두개의 TV채널이 동시에 중계했다. 지탄받아 마땅한 일이다.

전세계에서 모두 지상파 TV가 경기 대부분을 중복 중계한 나라는 대한민국밖에 없다. 월드컵 축구대회를 우리와 같이 공동 개최한 일본의 경우 공영방송인 NHK만 전 경기를 중계하고 상업방송들은 협의에 따라 선택적으로 중계했다.

그렇다면 우리 TV방송사들이 왜 그렇게 했을까? 그 까닭은 말할 것도 없이 시청률 지상주의 때문이었다. 중계에서 빠지면 시청률이 떨어질 것을 걱정한 탓에 죽기 살기로 양보없이 3사 모두가 전 경기를 중계키로 한 것이다. 그래서 방송사마다 비싼 중계료를 지불해야만 했다. 3사가 지불한 중계권료는 3천5백만달러에 이른다. 우리 돈으로 약 4백37억5천만원이 된다. 이 많은 투자액을 회수하고 이윤을 극대화하려다보니 방송편성을 월드컵 일색으로 도배질하지 않을 수 없게 돼 있었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시청자의 권리가 철저하게 박탈당한 것은 물론이고 지방자치선거마저 월드컵 열기 속에 파묻혀버리게 했다. 과학적 조사결과는 아니지만 투표율이 50% 이하였던 것은 정치에 대한 식상함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월드컵 일색의 방송 탓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6월 15일까지 3사의 저녁 메인 뉴스 건수의 73%가 월드컵 뉴스였던 데 비해 지방선거뉴스 등은 10%에 지나지 않았다. 그나마 시간대를 옮기고 시간도 단축한 뉴스시간에 온통 월드컵 얘기밖에 없다시피 한 탓에 6월 한달 동안 시청자들은 뉴스 문맹자가 돼야 했다. 이것이 방송의 횡포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그렇다고 중계방송이 제대로 된 것도 아니다. 국제대회의 경우 경기 결과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국운상승 운운하는 등 과장된 표현이 다반사였다. 아나운서나 해설자는 지나친 과장법이나 거친 어휘 등을 사용하지 말고 공정한 입장에서 경기상황을 전달해야 됨에도 그들이 먼저 흥분하고 심판의 판정에 시비를 거는 경우도 흔했다. 수십만 응원인파의 군중심리를 자극할 수 있는 말들이 여과없이 전파를 탔다.

과장된 멘트 귀에 거슬려

모 방송국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가 독일선수들의 약물복용이 밝혀져 우리 팀이 결승에 진출하게 되었다는 방송을 한 것을 그냥 해프닝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기본이 안된 사람들이 방송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독재정권뿐만 아니라 상업주의도 방송을 획일화한다는 교훈을 이번 월드컵 중계에서 뼈저리게 느꼈다. 이러한 우리 방송의 행패를 묵과해서는 안된다. 방송의 영향력이 크면 클수록 방송이 제 본분을 다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방송이 시청자를 우롱하지 못하도록 방송의 주인인 국민이 나서야 할 때다.

▶필자 약력=한국방송학회 회장·방송위원회 위원(부위원장)·한국언론학회 회장 등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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