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속 대접전-이것도 한국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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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제4보 (63~83)=먼지 자욱한 중앙의 들판에서 접전이 벌어지고 있다. 나의 살을 내주고 상대의 뼈를 노리는 한국식의 처절한 접전이다. 생사의 경계선을 수시로 넘나들어 보기에도 아찔하다.

가령 趙5단이 71로 몰았을 때 백이 무심코 '참고도'흑1로 때려내면 흑2로 막혀 단박에 회돌이축에 걸려든다. 그러니까 安4단이 72로 한번 젖혀 73을 강요한 것은 정확한 구명수단인 셈이다.

"그렇더라도 너무 어렵군요"라고 한 사람은 양재호9단이다. 梁9단도 바둑을 복잡하게 두는 편인데 이판을 보고는 혀를 내두른다. 우선 우상 귀로부터 시작해 무엇이 살고 무엇이 죽었는지 단정짓기 어렵다. 서로 삶을 찾아나간 중앙은 백이 수세인건 분명하지만 우상 일대의 흑진이 어떻게 확정될지 전혀 미지수다. 만약 이곳의 흑집이 무너진다면 흑도 장담할 수 없는 국면이 된다.

이런 스타일의 바둑에서 전형적인 '한국류'를 느낄 수 있다. 치열한 승부 호흡에다 생사를 알 길 없는 안개 속 행진. 일제 초기 순장바둑의 대가였던 백남규(白南圭)국수의 바둑을 일러 사람들은 이렇게 평했다.

"피차간 미완생의 바둑을 두는 것이 백남규의 수법이다(彼我不完生 白南圭之棋法)."

이 격렬한 순장바둑의 맥이 오늘날 '한국류'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일까. 82까지 백은 정처없이 뻗어나갔을 뿐 安4단이 이 싸움을 걸어 얻은 것이 아직은 보이지 않는다.

박치문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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