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운영위원님들! 학급문고에 싼 책만 채울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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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새학기가 되면서 학급문고를 만들자는 캠페인이 여기저기에서 일고 있다. 책방도 예외가 아니다.

일주일에 서너번씩 남매를 데리고 책방에 들르는 한 어머님이 문득 학급문고 얘기를 꺼내셨다. 학교에 갔더니 몇몇 학부모가 비품을 들여놓고 있더란다. 그런데 얼마 전 자신이 깨끗하게 빨아 달아놓은 커튼을 떼버리고 새것으로 교체하고 있었다. 비록 쓰던 커튼이었지만 새것처럼 멀쩡한 커튼을 떼어낸 광경을 보고, 혹시 학급비용에 여유가 있다면 학급문고를 마련하는 데 쓰는 게 어떠냐고 선생님께 말씀드렸다.

며칠 뒤 반 대표 학부모에게서 연락이 왔다. 청계천 같은 데 가서 전집 세트를 구입하겠노라고…. 그 얘기에 황급히 그만두시라고 손을 내저었다고 한다.

이런 풍경은 이 학급만이 아니다. 지난해엔가 경기도 어느 시골학교 운영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한 그림책 작가가 씩씩대며 전화를 하셨다. 학교에서 도서관 장서 구입 예산이 있다기에 만장일치로 지출 승인을 했는데 나중에 도서실에 들어온 책을 본 순간 기가 막혔다고 한다. 싸게 구입했다는 그 책들은 획일적인 디자인에 믿음이 안가는 내용으로, 자신이 보기엔 폐지처리장으로 가야 마땅할 물건들이었다. 그래서 문제제기를 했더니 교장선생님을 비롯한 나머지 학부모 위원들은 싼값에 많은 책을 샀는데 웬 불만이냐며 오히려 이 그림책 작가를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하더란다.

학급문고나 학교 도서관에서 만나는 책들이 전부인 아이들이 있다. 특히 마땅한 서점이나 문화시설이 없는 농어촌 학교일수록 그렇다. 때문에 학교에서 마련하는 책은 최고의 책이어야 한다. 생각하고 또 생각해 정성들여 마련해야 한다.

언젠가 김포 시내에서 30분쯤 들어가는 작은 농촌 마을의 초등학교 도서관에 책을 납품하러 간 적이 있다. 약도를 보고 물어 물어 찾아간 그 학교는 한 학년에 한두 학급 될 정도의 아담한 규모였다. 학교에 도착하자 우리 도서관에 들어갈 책이 왔다며 도서담당 선생님과 아이들이 일을 거들러 뛰어나왔다. 이 학교 동창회장은 밭일을 하다 말고 손수레를 끌고 달려오셨다. "이게 모두 우리가 볼 책이에요?" "응, 우리 학교 동창회에서 마련해 주신 거야."

교장선생님, 선생님, 동창회장, 아이들 모두 한 가족처럼 좋아하며 책을 정돈하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없는 풍경이다. 더구나 한 권 한 권을 여기저기에서 취합한 목록과 자료 등을 참고해 수백권을 선정해 주문한 그 정성이라니….

<어린이책 전문서점 '동화나라'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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