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치동 현상'의 모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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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지난 주 토요일 밤, 학원에 간 중3짜리 아들을 데리러 집에서 몇 블록 떨어진 대치동에 갔다. 시간이 남아 차에서 내려 거리를 왔다갔다 하던 중 늦은 시간인데도 불이 켜진 부동산소개업소가 눈에 띄었다. "참, 여기가 학원 때문에 집값이 뛰었다는 대치동이지…." 호기심에 '오늘의 시세판'을 보면서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매매, W아파트 31평 5억5천만원, 45평 9억원'.

상상하지 못했던 액수였다. 정말 이렇게 거래가 되고 있다는 말인지 궁금해 안으로 들어갔다. 40대 후반의 소개업자는 "최근 3개월여 사이에 이곳 집값이 80% 가량 뛰었다"며 "실제 거래가격은 시세판보다 2천만원 내지 3천만원 더 높다"고 말했다. 전세가격도 강북지역 같은 평수 아파트 두채 값 가까이 된다고 했다.

"평당 2천만원이라…." 정리가 잘 안되는 생각들이 뒤죽박죽 떠올랐다. "이젠 월급쟁이 해서 강남에 집 마련하기는 어렵겠군." "20대 80 사회가 된다고 하더니 이게 그건가?" "이러다 인플레이션이 오는 것 아닌가?" "유별난 교육열의 위력이 이렇게 큰가?" "거품이겠지…."

그런 혼란스런 감상들은 부동산 전문가들의 설명을 종합해 보고서야 하루 만에 대충 정리가 됐다. 대치동 집값은 일부 거품이 없는 것은 아니나 자유시장원리에 따른 당연한 현상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몇가지 여건은 이렇다. 강남 개발 후 굵직한 기업체들이 꾸준히 들어서고 최근 테헤란로 주변에 벤처기업들이 밀집하면서 수요가 늘어 강남 아파트값이 오르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대치동은 인근에 최고 분양가의 주상복합건물이 들어서면서 기존 아파트값 인상을 부채질했고, '학원 8학군'의 위상까지 가세해 '좋은 것은 모두 뭉친 최고의 주거지'로 꼽히면서 집값이 폭등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전문가는 "일반인은 꿈도 못꾸는 미국 뉴욕의 맨해튼에 있는 고급 아파트를 생각하면 된다"고 말했다. 듣고 보니 그런 비유도 무리는 아닌 듯했다. 거부감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것이 우리사회의 한 모습임을 어찌하겠는가.

그러나 '대치동 현상'엔 커다란 모순이 있다. 이곳에서 시장원리가 극명하게 나타난 요인 중의 하나가 반(反)시장 원리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교육문제다. 학생과 학부모의 선택권을 없앤 고교 평준화정책 결과 경제적 여건이 우수한 서울 강남을 중심으로 새로운 명문학군이 생겼고, 그 중에서도 학원이 밀집한 대치동은 교육특구로 부상했다.

한국개발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고교 졸업생 1백명 가운데 서울대 입학생수가 서울 강남구는 2.7명인 반면 어느 강북구는 0.25명에 불과하고, 연세대와 고려대를 합친 숫자도 강북이 강남의 5분의1에도 못미친다. 평준화가 교육의 빈부 차이를 더 확대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 교육이 신분상승의 유일한 통로였던 시절 한남동·장충동·성북동은 없는 집 아이들에게 자극제가 됐다. 하지만 대치동은 다르다. 그곳은 교육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지역이 되고 있다.

한 지역의 집값이 유별나게 비싸 보통사람은 엄두도 못낸다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그런 지역을 보면서 사람들이 교육의 계층화를 생각하게 된다면 사회적으로도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다. 이 정도라면 단순히 평등하게 교육받을 기본권리가 훼손되고 있다는 교육문제로 생각할 일이 아니다. 돈 없으면 좋은 대학 가기 힘들고, 그만큼 '출세'할 기회도 줄어드는 계급사회적 교육현상은 사회시스템의 이상 징후라고 할 것이다. 대치동 현상은 고교평준화 등 우리 교육의 기본에 대한 점검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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