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지성의 황폐화-대학도서관 : 도서관數 하버드대 90개·서울대 7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6면

"미국의 지방 소도시 대학에서도 세계적 수준의 논문이 나올 수 있는 것은 대학 도서관에서 상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 내 모든 도서관이 유기적으로 연계돼 자료를 공유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미국의 공공도서관에서 6년간 사서로 일한 바 있는 신숙원(영문학과 교수) 서강대 도서관장의 지적이다. 대학 도서관의 캠퍼스 내 위치는 물론 규모·인원·예산 등을 종합해 볼 때 한국의 대학 도서관은 대학의 '심장부'가 아니라 '맹장'이다. 국내 대학 도서관도 공공도서관 등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각종 시험 준비용 독서실 기능을 주로 하고 있다.

◇하버드대 건물 절반이 도서관=선진국의 경우 한 대학 안에 도서관이 한 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중앙도서관·단과대 도서관·전문 도서관 등 수십 개가 보통이다. 미국 하버드대는 90개나 된다. 동양학 자료를 많이 소장해 우리에게도 친숙한 옌칭도서관은 90개 중 하나일 뿐이다.

최근 미국 대학도서관을 둘러보고 온 한 대학교 사서는 "하버드대학 내 건물의 절반 가량이 도서관이고 전체 직원의 절반이 도서관 업무와 관련돼 있다"고 말한다. 도서관이 캠퍼스 내에 가장 좋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한마디로 선진국 대학도서관은 대학의 심장에 걸맞은 위상과 지원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일리노이대 40개, 버클리대 25개, 스탠퍼드대는 20개의 도서관이 있다. 서울대에는 법학·사회과학·경영·의학 도서관 등 6개의 전문도서관과 중앙도서관을 합쳐 7개가 있다.

김용석 전 이탈리아 그레고리안대 교수는 귀국 후 대학도서관 출입이 안돼 겪는 고충을 토로하면서 "선진국처럼 대학도서관을 재야 학자나 시민들에게 개방하는 것도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양적으로 절대 부족한 우리 현실에서 당장 일반인 대출까지 실시하기는 힘들겠지만 가야 할 길임은 분명하다.

◇평범한 정보, 평범한 논문=국내 대학도서관에서 얻는 서지정보는 대개 서명·저자명·키워드다. 전문적으로 세분화된 정보를 얻을 수 없다. 전문성 부족은 도서관을 덜 찾게 만드는 악순환의 고리다. 예컨대 '셰익스피어'에 관한 나열식 광범한 정보는 물론이고 더욱 미세하게 분석된 '셰익스피어 작품에 나오는 여성의 이미지' 등 주제별 정보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선진국 대학 도서관에서 주제별 정보는 누가 조사하는가. 전문성을 갖춘 사서가 책·논문·잡지 등을 검토해 입력한다. 미국 대학도서관의 주제전문 사서는 모두 석사 이상으로 교수급 대우를 받는 전문직이다. 이들의 초봉은 대략 4만달러(5천만원)다. 학부에서 인문·사회·자연과학 등 각 분야의 전공을 이수한 사람들이 전문대학원에서 문헌정보학을 공부한 후 사서가 되고 이들이 도서관장이 된다.

우리는 최소한의 인력으로 도서 구입·정리·대출같은 일상적 업무를 하기에도 빡빡해 주제별 상세 분류 등은 엄두도 못내는 실정이다. 사서를 배출하는 문헌정보학과를 선진국처럼 전문대학원으로 만드는 것도 생각해 봐야 할 사안이다.

◇대학도서관 네트워크=미국 하버드대학 도서관의 1인당 장서 수는 4백74권이다. 국내 최대인 서울대는 62권이고, 서울대와 규모가 비슷한 버클리대학은 2백40권이다. 국내 대학 도서관 전체에서 구독하는 해외 학술지가 총 1만5천종인데 반해 미국 하버드대학 도서관 한곳에서만 구독하는 학술지 총수가 11만종이다. 이는 국력과 예산의 부족에 따른 결과라 치자.

수치상의 부족함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도서관 간 연계가 없다는 것이다. 독일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고 최근 귀국한 한 연구자는 "독일 전역 대학도서관에선 다른 곳의 자료도 누구나 자유롭게 대출할 수 있다"고 말한다. 자료가 훨씬 많은 선진국도 네트워크를 형성해 상호 대출을 하며 중복투자를 줄이고 있는 것이다.

정동열(이화여대 문헌정보학)교수는 "국내 4백개 대학도서관의 장서는 약 6천8백만권이지만 중복 도서를 제외하면 실제 6백만종에 불과하다"고 지적하며 "이는 정보 공유에 대한 인식 부족과 대학 간 이기주의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최근 서울대와 연세대는 도서관 간 상호교류협정을 맺어 교수와 박사과정생에 한해 자료를 서로 대출해 주기로 했다. 한발짝 나아간 모습이지만 도서관 네트워크는 일부에 국한할 문제가 아니다.

◇도서관 인식 바꾸기에 앞장서야=지난해 교수신문 조사에 따르면 대학도서관에서 대출하는 책은 대부분 무협·팬터지류였다. 도서관 대신 게임방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대학생만을 탓할 수도 없다.

강원대에선 고육책으로 올해부터 일정 수준의 책을 읽지 않으면 졸업시키지 않는 '독서 인증제'를 실시하기로 해 눈길을 끈다. "연구중심 대학 육성을 내세우면서 대학 도서관에 대한 중장기 계획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곳은 없다"는 한 사서의 지적을 되새기게 하는 현실이다.

어쨌든 국내 대학 도서관의 환경이 그나마 공공도서관이나 학교 도서관보다 상대적으로 양호한 것은 이용자들의 수준 높은 요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대학 도서관을 대학의 진정한 '심장부'가 되게 하는 것을 넘어 국내 도서관 문화를 바꾸는데 대학 도서관이 앞장서 주길 기대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용자의 인식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돈을 들여 훌륭한 시스템을 구축한다 해도 소용없는 일"이라고 도서관 종사자들은 입을 모은다.

배영대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