勞使싸움에 갈곳 잃은 동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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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노사 갈등을 겪고 있다고 해서 회사가 죄없는 아이들까지 쫓아냈어요."

서울 강서구 염창동에 있는 반도체 조립 하청회사 한국시그네틱스에서 일하다 최근 해고된 장경희(張景熙·32·여)씨는 요즘 네살배기 아들을 직장동료의 집에 맡겨두고 공장 앞마당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다.

서울 공장을 경기도 안산으로 옮기는 문제를 놓고 지난해 7월부터 노조와 갈등을 빚어온 회사가 이전에 반대하는 근로자 1백여명을 해고한 데 이어 지난 5일 새벽 기습적으로 회사 어린이집을 철거했기 때문이다.이곳에 맡겨오던 어린이 38명은 엄마와 떨어져 있는 시간에는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됐다.

회사측은 강서구청이 7일 "어린이집을 강제 폐쇄한 것은 불법"이라며 경찰에 고발했는데도 11일 새벽 일부 남아 있던 시설마저 부쉈다. 張씨는 "농성 중인 조합원의 80%가 기혼여성"이라며 "어린이집을 복구하라는 결정이 내려지더라도 공사에 1개월 이상 걸려 난감할 뿐"이라고 말했다.

이 회사가 노사협약에 따라 어린이집을 설립한 것은 1995년. 그동안 정부와 회사가 운영비용을 절반씩 부담해 여직원들의 6세 미만 자녀들을 보육해왔다.

노조 간부 공정혜(孔貞惠·33·여)씨는 "여성 근로자들이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지면 농성에 참여하지 않을 것으로 회사가 판단한 것 같다"며 "어른들의 갈등에 아이들을 인질로 삼는 것 같아 씁쓸하다"고 말했다.

어린이집이 폐쇄되는 바람에 곤란을 겪기는 관할 강서구청도 마찬가지다. 이 회사 여성근로자들이 갈 곳이 없어진 자녀들을 데리고 거의 매일 구청으로 몰려와 맡아달라고 아우성이기 때문이다. 강서구청 김조자(金照子)가정복지과장은 "영·유아보육법에 따르면 어린이집을 폐쇄할 때는 반드시 아이들이 옮겨갈 시설을 마련해야 한다"고 밝혔다.

한편 회사측은 "회사의 방침에 반대해 해고된 근로자를 위해 어린이집을 운영할 수 없다"며 "구청의 고발에 법적으로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김선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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