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타 열풍… 답답한 현실 탈출 '사이버 변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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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공인회계사인 송모(34.세이클럽 회원)씨의 여가활용은 남다르다. 늘 말쑥한 정장차림이지만 채팅 사이트 '세이클럽' 에서는 '젊은 오빠' 로 탈바꿈한다. 회오리처럼 하늘로 치솟은 빨강 머리에 빨간색 뿔테안경 차림. 여기에 큼직한 금목걸이를 한 그는 음악방송의 사이버 자키(CJ)로 나선다.

송씨는 "캐릭터를 꾸미는 데 매달 5천원 정도 쓴다" 며 "현실에서는 매일 짜여진 일정대로 움직이지만 가상공간에서는 모든 것을 잊고 젊은 시절로 돌아간 느낌" 이라고 말했다.

'또 하나의 인생을 가상 세계에서 산다' 는 개념의 아바타가 유독 우리나라에서는 유행을 넘어 사회 현상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10대를 비롯한 젊은 네티즌들은 가상공간에 또 다른 '나' 를 만들어 자신을 가꾸고 놀며 사귄다. 어른들이라면 모니터 화면 속 허상으로 치부해 버릴 의상과 액세서리 하나에 몇천원씩, 달마다 몇만원씩을 아낌없이 쏟아붓는다.

10대에만 국한된 것도 아니다. 세이클럽의 경우 아바타 아이템에 돈을 지불하는 사람의 34%는 20~30대라고 한다. 프리챌 관계자는 "요즘은 40대 이상 중년층들도 아바타를 만드는 사례가 적지 않다" 고 말했다.

'꾸미기' 라고 여성들만 즐기는 것도 아니다. 프리챌에는 3백10개의 아이템을 가진 26세의 남성을 비롯해 1백여개의 의상을 가진 남성 회원이 셀 수 없을 정도다.

아바타가 이처럼 유행하게 된 것은 지난해 11월 인터넷 사이트 세이클럽이 서비스를 하면서부터. 불과 1년도 안돼 인터넷 사이트마다 아바타가 없는 곳을 찾기 어렵게 됐다.

이는 무엇보다 세계최고 수준의 초고속 인터넷.PC방 보급률 등의 인프라가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상공간' 외에는 대안이 없어 여기에 친숙해진 현실과 모든 면에서 빠른 결론을 찾는 우리 국민성도 한 몫 한다.

디지털평론가인 손형국씨는 "우리 청소년들은 현실에서는 학교.학원.가정 등 극히 제한된 커뮤니티 활동만 가능하다" 며 "또래끼리의 놀이문화가 사실상 거의 없는 10대들에게 네트워크에 연결된 PC는 현실을 피해 자기 꿈을 펼칠 수 있는 유일한 공간" 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또 "기존 전자상거래처럼 온-오프라인이 결합된 방식이 아니라, 사이버세상에서 모든 것을 체험할 수 있는 자기완결형 사이버세상을 구현한다는 점에서 아바타를 주목해야 한다" 고 말한다.

아바타 붐에 따라 관련 기술개발도 잇따르고 있다. 평면적 아바타와 달리 3차원으로 꾸미거나 사진을 합성해 보다 현실감 있는 아바타를 만드는 기술도 이미 선보였다. 아바타의 움직임에 따라 다양한 표정을 짓거나 음성합성도 조만간 현실화될 전망이다.

반면 어두운 면도 없지 않다. 대표적인 것이 10대들의 과소비. 아이템을 사느라 매달 수십만원씩 쓰는 바람에 부모와 갈등을 일으키는 사례가 꼬리를 문다. 아이템을 상대방으로부터 선물받기 위해 일부에서 나타나는 '음란 채팅' '사이버 원조교제' 등도 문제다.

그러나 부정적인 요소를 줄이고 경제.문화적으로 이를 육성하면 새로운 문화적 에너지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손형국씨는 "아바타 붐에서 보듯 한국인들은 현실과 가상을 구분하지 않고 관계를 맺고 발전시키는 데 높은 열정을 보인다" 며 "이를 좁은 국토와 제한된 경제력이라는 '현실' 을 넘어서는 에너지로 승화시키는데 관심을 쏟을 때" 라고 말했다.

이승녕.원낙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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